관리 메뉴

함께쓰는 민주주의

또 하나의 미술, 또 다른 미술 탄압 여성미술 본문

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또 하나의 미술, 또 다른 미술 탄압 여성미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5. 19. 10:43

 

 

 

세종31년(1449) 사간원의 상소 중에 “부인은 바깥에서 할 일이 없는데, 지금 경외의 양반 부녀들은 향도 혹은 신사라고 칭하면서 각기 술과 고기를 준비하여 공연히 모여 마음대로 즐기니 풍교에 누가 됩니다.”라며 음사의 금지를 요청한 일이 있다. 이것은 미신의 배제라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상 부녀자들이 문밖을 출입하여 바깥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금지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이 상소는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사족의 부녀로서 산간이나 물가에서 놀이나 잔치를 하고 야제나 산천성황의 사묘제를 직접 지낸 자’에 관한 처벌 규정(장 1백 대)이 오르게 되었다.

 

여기가 어딘데 감히 치마를 펄럭이냐

“일단 가부장적인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 필요했어요. 종묘는 앞에 공원이 있어서 축제공간으로도 적격이었어요. 제례가 열리는 남성들의 공간을 여성의 몸과 대비시켜보려는 게 우리 의도였어요. 또 유교적 엄숙주의를 뒤집고 오래된 문화재를 현대 미술품으로 바꿔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방궁(아름답고 방대한 자궁) 종묘점거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여성주의 미술그룹 ‘입김(정정엽, 곽은숙, 류준화, 우신희, 하인선, 제미란, 윤희수, 김명진)’의 기획 취지이다.
이 행사는 말 그대로 여성들의 미술축제였다. ‘가부장적 유교문화 뒤집기’라는 예술 프로젝트를 축제의 놀이 개념으로 극대화한 것이다. 아마도 이 사건에 전주 이씨 종친회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냥 조용히 넘어갔을 행사였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작가 종묘 습격>이라는 신문기사를 보고 발끈한 종친회는 급기야 아방궁 종묘점거 프로젝트를 습격하고 말았다.
행사 당일 종묘 앞 공원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했고 쫓기는 여성작가들은 작품들이 파손되는 현장을 지켜보고만 있어야만 했다.

 


'종묘점거'라는 제목에 전주 이씨 종친회 측이 강력히 반발하며 여성들의 미술축제를 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지난 2000년 이 사건의 경과를 보면 (9. 27) 모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종묘점거’라는 제목에 발끈한 전주이씨 종친회 측은 “행사 장소를 바꾸어라, 그렇지 않을 시는 어떠한 무력행사로도 이 축제를 저지하겠다.”는 일방적 통고를 했다. (9. 28) 그러나 이미 6개월 전부터 종묘공원의 현장 구성도와 작품 설치 계획 등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작가들은 종로경찰서에 신변보호 요청을 하고 계획대로 행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9. 29) 아침 7시부터 작가들은 행사 준비를 위해 작품을 설치했고 종친회는 9시부터 설치된 작품들을 뜯어내며 행사를 중지하라고 압력을 가해왔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곳에 와서 물감통을 발로 차며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풍선길을 만들고 있는 장소에 와서는 색실을 끊어내고, 여성의 신체를 쿠션으로 제작한 작품들 중 일부를 들고 가서 성적인 폭언을 하며 작가들을 모욕하였다. 작가들은 작품과 짐을 들고 종묘공원 여기저기를 피해 다녔고, 이 과정에서 종묘공원을 치마형태의 깃발로 장식한 상징물들이 찢어지고, 몇 개의 작품은 그들에게 탈취 당했다. 일단 작품을 한군데 모아놓고 지키면서 대책을 논의했으나 이미 많은 작품이 훼손되고 지속되는 무력 행사와 확성기를 이용한 종친회 측의 잇단 성명서 발표로 인해 오후 3시 작가들은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 사건은 여성작가들이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2심)에서 “원고들에게 100만 원씩 지급하라”며 1심을 깨고 원고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고 작품들의 표현이나 내용이 우리 사회의 이성적 상식에 반 할 정도로 음란하다거나 타인의 명예 또는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피고가 다수의 위력으로 행사 개최를 단념하게 한 것은 헌법상 보장된 학문과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제공 윤이상 평화재단, 대전 이응노미술관, 문순옥

 
한국에서 여성미술을 개척한 김인순과 여성미술연구회

한국 여성미술의 새 길을 처음 연 사람들은 1980년대 중반 무렵 활동한 ‘여성미술연구회’(여미연)이다. 김인순을 중심으로 한 여미연은 <여성과 현실> 전을 기획하여 여성과 노동 현장, 중산층 여성의 허위의식 등 여성의 삶을 통해 계급과 소외의 문제를 다루었다. 여미연은 여성성의 문제보다는 당시 한국적 상황에서 여성을 하나의 착취 받는 계급으로 보고 여성의 문제를 인간해방의 문제로 확장시켰다.
그들은 회화 작품을 통해 당대의 문제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실상과 참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였다. 특히 김인순의 <그린힐 화재에서 22명의 딸들이 죽다>란 그림은 당시 최초의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대중에게 충격적으로 선보인 그림이다. 소규모의 봉제공장 기숙사에서 일어난 화재는 여성 공원들의 외출을 막기 위해 잠겨있었다. 김인순은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그 참상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일깨웠다. 여성성과 같은 개념들은 당대의 현실 앞에서는 사치인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여성미술은 그 출발에서부터 계급성이라는 문제를 안고 가야만 했다. 노동 문제와 함께 김인순은 성 모순, 계급 모순이 드러나는 여성의 문제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우스개 소리처럼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집에 돌아온 노예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은 바로 노예의 부인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반에서 하나로>라는 제목의 전시에 출품한 김인순의 <현모양처>는 학사모를 쓴 여성이 신문을 읽고 있는 남편의 발을 닦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에서의 현모양처라는 통념을 한 눈에 갈파하도록 그려진 그림인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파출소에서 일어난 강간> 역시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고 있다.
한 여인이 파출소에서 두 명의 경찰에게 강간을 당한 이 사건은 적반하장 격으로 여인에게 세간의 손가락질을 당하게 만든다. 김인순은 이런 개인적 창작뿐만 아니라 여성미술의 선두주자로서 후배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수많은 걸개그림과 노동현장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1987년 7월 ‘우리 모두 하나가 되는 그림 그리기’가 준비되었는데, 김인순과 윤석남, 김종례, 구선회, 정정엽, 최경숙은 시민들과 함께 걸개를 완성했다. 이것은 같은 해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1987년 11월 2일 남대문경찰서 형사들이 여미연 사무실에 불법 난입하여 김인순에게 연행영장을 제시하며 엽서 7천 매 전량을 압수하고 인쇄소 직원을 연행하였다. 이와 같이 김인순은 여성해방을 이루기 위한 예술적 전망을 당대의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맞서면서 펼쳐 나갔다.

글·자료사진 전승보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 대학원 큐레이터학과를 졸업했다. <창원 2007아시아미술제>, <2006아시아미술포럼>, <아시아의 지금 - 에피소드 2004>, <열다섯마을 이야기>전 등을 기획했다. 현재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