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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 시대 읽기/이런책 저런책

[이런책 저런책]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 7. 11. 11:02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 조은평 강지은 옮김 / 동녘 -


글 박호경/ hokyoungpark@gmail.com



“나무여, 너는 땅속으로 가서 / 푸른 식물로 다시 태어나거라 / 나도 땅속으로 가서 / 시인으로 다시 태어날지 / 영원히 말 안 하는 바위가 될지 / 한 천년 쯤 생각해 보리라.” (문정희의 시 ’부탁’)


우리는 늘 바쁘지만 사실은 고독하다. 시인 문정희와 같이 영웅적 고독을 꿈꾸기는커녕 온종일 휴대전화 속의 페이스북을 통해 누군가와 대화하고 재잘댄다. 겉으로는 땅 위에 발 딛고 곧추서 있는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둥둥 떠있을 뿐이다.  


알랭 투렌과 더불어 현대 유럽 사상을 대표하는 학자로 평가받는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유동하는 근대 속에서 우리의 삶이 왜 불안하고 피로한지 파헤친다. 


1980년대 초까지 정통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로 영국 노동운동과 계급갈등을 중점 연구했던 바우만. 그는 2000년대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제도, 도덕 등이 해체돼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이른바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으로 주목을 받았다. 유동성이라는 유연성은 잔잔한 파도만큼이나 이중적이다.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노동시장의 정리해고, 비정규직의 급속한 증가,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노동의 질 그리고 이로부터 밀려드는 불안한 미래. 이렇듯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잔혹한 세계가 바로 유동하는 근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자그마한 안락함에 취해 유동하는 근대를 지탱하는 부지런한 개미가 되어 여기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 모두가 자신만은 바다 위에서 안전하게 유랑할 수 있는 거대한 유람선에 승선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어, 언제든지 파도 속에 휩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잊어버린다. 아니 의도적으로 잊어버리려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비겁하고 유동하는 근대는 더욱 불길하다.  


이 책은 바우만이 2008년에서 2009년까지 이탈리아의 한 주간지에 ‘유동하는 근대에 띄우는 44편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글을 수정하고 편집해서 엮은 것이다. 교육, 종교, 트위터, 오바마, 유행, 신종플루, 건강불평등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쓴 짧은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철 풍경 ©오마이뉴스지하철 풍경 ©오마이뉴스


우선 몇 가지 흥미로운 편지의 봉투를 열어보자.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 속에서 사람들이 고독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일갈한다. 지하철이나 사무실에서 모두 휴대전화에 머리를 처박고 쉼 없이 의사소통하는 지금의 모습은 그래서 아이러니하다. 바우만은 고독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을 제공한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고독의 맛을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유동하는 근대에서 문화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그는 유동하는 근대에서 문화는 소비자들로 이뤄진 우리 사회에 걸맞게 규범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제안(제공, 할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일갈한다. 즉 문화 역시 소비를 목적으로 의도된 상품들이 쌓여 있는 창고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의 문화는 함양해야 하는 사람들을 갖는 대신 유혹해야만 하는 고객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온하고 불안한 유동하는 근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바우만의 요구는 간단하다. 우리들 자신이 각자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사실은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완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처럼 공동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함께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들이 처한 이 불안한 유동하는 근대라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의 다양한 요구들에 과감히 저항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카뮈가 지적했듯이 “자신들만의 부조리한 상황에서 홀로 무겁게 돌을 굴려야만 하는 시지프스가 이제는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맞서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와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정원대선개입촛불시위 ©뉴시스국정원대선개입촛불시위 ©뉴시스


몇 년 전 바우만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단 한 구절로 요약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명 굴욕적인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사명이 어떤 어려움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결코 그처럼 굴욕적인 것들이든 아름다운 것들이든 간에 둘 중 어느 하나에도 불성실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카뮈의 말을 빌려 대답했다. 

인간이 경험해온 대단히 복잡한 길들을 탐사하고 기록해 온 한 사회주의자가 추구해온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지 ‘밀양’의 함성이 들리는 시청과 ‘촛불’이 다시금 불타고 있는 청계천을 보며 이를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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