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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책 저런책] 누가 공동체 붕괴를 원하는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 6. 13. 16:42

누가 공동체 붕괴를 원하는가?

-인디언 마을 공화국-


글 장종관/ zazajan@hanmail.net



<인디언 마을 공화국 -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왜 국가를 만들지 않았을까> 여치헌 지음 (휴머니스트)


눈 깜빡할 사이에 솟아나는 고층빌딩, 수많은 집들이 언제 헐렸는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새로 등장하는 아파트촌, 그리고 작은 가게들을 하나 둘 잠식하며 모든 지역 상권들을 무너트리고 있는 대형마트와 대형유통체인점의 폭주!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 한 복판이다. 


언제부턴가 이렇게 단절된 개인과 소비가 찬양받는 서울에서도 ‘공동체’, ‘마을 커뮤니티’, ‘마을기업’ ‘협동조합’ 등의 말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시 시장이 주도적으로 마을 공동체를 복원시키겠다면서 발 벗고 나서기까지 하는 상황이다.  

우리 전통으로 자리했었던 ‘이웃사촌’들로 이루어진 마을이 사라지고, 지금 사라졌던 그 공동체를 복원시키려고 하는 이 시점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마을이라는 게 도대체 어떻게 사라지게 된 거지?’ 그런 질문을 시작으로 읽게 된 책이 한 권 있었다. 

 

 “북아메리카 땅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가던 인디언을 몰아내고 미국을 건설하는 데 동원된 논리의 허상을 밝혀내지 않는다면, 고삐 풀린 금융자본과 무한증식의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서는, 그 옛날의 인디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나게 될 것이다.”  


<인디언 마을공화국>의 저자는 변호사로 일하면서 ‘한국인 아버지와 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둘러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인디언’을 만난다.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인디언 처녀와 한국인 청년이 대학에서 인디언 역사 강의를 같이 들으며 사랑을 키워나가는 소설을 쓰려고 자료를 수집하던 과정에서 인디언 부족의 역사에 관해 깊게 알아가게 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저자는 ‘세계평화의 전도사로 자처하는 미국이 인디언을 살육하고 그들의 땅을 강탈한 사실을 어떻게 합리화했는가’ 와 ‘인디언 부족들이 연합해서 미국 정부에 대항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인디언은 국가를 만들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안 만든 것일까?’ 등의 질문으로 글을 풀어간다.  

 

 15세기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1200만 명 이상의 인디언이 600개가 넘는 부족으로 나뉘어 살았고 이들 부족은 각각의 언어에 생활방식도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인디언 부족은 비강제적인 정치권력을 가진 ‘국가 없는 사회’ 였다. 하지만 현재(2000년 통계국 자료)의 인디언은 전체 미국인의 1퍼센트에 조금 못 미치는 250만 명가량 된다. 그리고 이 중에서 3분의 2에 육박하는 인디언이 도시에 거주하는 도시 인디언이다. 인디언 부족과 인디언의 땅이 사라지는 만큼 미국 영토는 커졌다. 미국은 인디언 부족사회를 붕괴시키기 위해 강제 이주와 보호구역, 교육, 종교, 토지 제도를 통한 동화정책을 펼쳤다. ‘인디언의 정체성을 없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인디언 부족 출신 학생들을 기숙학교에 넣었다. 성장기의 아이들은 부모와 마을로부터 격리되어 부족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노동자로 만들어졌다. 이렇듯 제도화된 교육이 부족사회에 침투하여 배움의 과정을 독점하면서 배움은 서로 간의 경쟁으로 전락했고, 일상생활에서 성스러운 기억을 체험하기가 어려워졌다.

 

백인 사회의 교육제도가 이렇게 인디언의 영성을 파괴하게 되자, 부족사회라는 속(俗)에서 성(聖)이 사라졌다. 인디언은 속(俗)에 성(聖)이 있는, 즉 삶 그 자체가 종교였다. 인디언에게 신앙이란 세상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정령을 찬양하고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는 정령은 바람이나 비, 바위나 강, 들소와 같은 것이었다. 인디언의 부족신앙과 백인의 기독교의 차이는 시간과 장소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디언의 땅은 장소이며 개개인의 경험이 장소와 이야기를 통해 후대에 전달됨으로써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서로 연결된다고 한다. 반면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백인은 경계를 지우는 직선적 공간개념뿐만 아니라 시간마저도 분, 초 단위로 나눌 수 있는 직선적 시간관을 강조하면서 개발과 착취의 근대화를 추구했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인디언 부족 신앙 대신에 기독교를 믿게 해야만 인디언이 땅을 사고파는 것으로 여길 것이라고 판단하고 부족 신앙 말살 정책을 펼친다. 

 

미국 정부가 종교와 교육제도와 더불어 주입하고자 했던 동화정책은 ‘소유적 개인주의’였다. 인디언을 산업사회에 부합하는 유형의 인간으로 바꾸려면 특정 부족의 부족민이 아닌 노동자와 소비자의 모습으로 살게 해야 했고, 인디언과 부족과의 연결 고리를 차단하는 하기 위해 인디언이 상품에 의존하면서 화폐를 축적하며 살아가게끔 했다. 또한 공동자산으로 생각하고 있는 토지를 '거래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하기 위해 ‘도즈법’이라는 정책도 만들었다. 1887년 미국은 공동 자산인 부족 토지를 인디언 개개인에 할당하는 내용의 도즈법을 제정했다. 도즈법을 통해 미국정부는 인디언에게 가족을 기본 단위로 토지를 배분했다. 부족 공동자산에 기초해서 생활하던 인디언의 경제생활을 가족 단위로 전환하게 한 것이다. 

 

미국 백인의 인디언 동화정책을 알아가며 21세기 대한민국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장소에 뿌리박은 토착의 삶이 희생되는 곳이 인디언 마을뿐이랴. 대한민국에도 경남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을 벌이다 분신자살을 한 이웃의 주검을 목격해야하는 촌락민들의 비극이 있고, 토착의 삶이 위협받는 현실은 제주에서도 진행 중이다.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계획에 지역공동체는 장소의 뿌리박은 토착의 삶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주민들과 최대의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주민들로 나뉘어 갈등하고, 국가는 토지보상, 지장물 보상 등의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촌락공동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인디언 속(俗)에 성(聖)이 있는 삶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것이고, ‘장소 상실’ 이 된다는 의미이다. ‘장소 상실’은 결국 상업적, 국가적 개발 과정에서 개성을 박탈당하고 동질적이고 규격화된 경관으로 변화됨으로써 결국 고유한 장소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산업사회의 개발이데올로기 연장선에서 국가이익을 앞세워 촌락 공동체를 사라지게 만들고,  근대 자본주의 최악의 질병인 ‘자발적 복종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주체가 만들어지고 있다. 부모는 국가와 기업의 경제활동 시스템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고 아이들은 국가와 기업이 만들어놓은 교육시스템 안에서 서로 경쟁한다. 

시스템에 장악당한 시장을 되찾아오는 일은 국가가 아닌 ‘국가보다 오래된 사회’ 만이 가능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무한경쟁의 산업사회에서 공동 자산과 상호부조로 돌아가는 마을이 붕괴되고 국가와 개인만 존재하는 사회에서 국가보다 오래된 토착민들의 연대 전선을 꾸리기가 쉽지만은 않은게 현실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개인이 하고 그 일을 사회가 맡아서는 안 되며, 하위 조직체가 할 일은 상위 조직체가 대신해서는 안 되고, 이러한 원리가 구현되려면 국가 권한의 특정 부분을 국가가 아닌 사회에 양도해야 한다는 가톨릭 사회 교리에서 발전한 보조성의 원리가 입법화되는 것도 꿈같은 일이다. 

마지막 위안은 “산업사회에 사는 이상 그 사회의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인간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안락한 생활 속에 자신의 삶을 좀먹도록 방치하지 않는 항상 깨어 있는 불안한 양심” 이다. 그 양심의 소리를 서로 귀담아 듣기 시작할 때 우리의 마을은 다시 우리 곁에 만들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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