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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 시대 읽기/이런책 저런책

[이런책 저런책] 절망 앞에서 다시 서기 『살아야 하는 이유』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3. 11. 22:33

절망 앞에서 다시 서기
『살아야 하는 이유』

(강상중 지음, 송태욱옮김, 사계절, 2012)


글 홍순성/ rosaleo@naver.com




고민하는 힘

강상중은 ‘고민하는 인간’을 다시 이야기한다. 사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5년 전 나온 『고민하는 힘』(2008, 사계절)의 속편이다. 그는 전작에 이어 여전히 백여 년 전의 ‘고민하는 인간의 선구자들’인 나스메소세끼(夏目漱石)와 막스 베버(Max Weber)의 말을 씹어서 자기 말로 뱉어낸다. 하지만 전작과 다른 점은, 아들을 잃은 개인적 절망과 스스로 미증유의 절망이라고 표현한 공동체적 절망(3.11 후쿠시마의 핵발전소 사고)이 준 실존적 성찰에서 얻은 마음의 변화인 것 같다.

일본 동북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지 만 2년이 지났다. 1755년 리스본의 대지진이 유럽의 근대를 흔들었듯이, 동일본의 재앙은 세계의 재앙이 되었다. 서울에서도 시청 앞 광장에서 사고 2주기 반핵․탈핵 행사가 있었다. 저자의 말대로 자연의 법칙이 숭배되어야 할 것이 된 근대 이후 지속된 견고한 과학주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붕괴된 것이다. 그날, “신앙에 의지해 살고 있던 중세 사람들이 그 신앙을 통째로 부정당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고통을 대면하는 인간의 힘

올해 2월 25일, 저자의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일본 NHK방송과 다큐멘터리를 작업 중인데 그 일환으로 내가 사는 동네에서 몇 주 동안 활동하는 모습을 촬영을 하고 있었다. 목포에서 출발해서, 논산을 거쳐 국도 1호선을 따라 서울의 성산동에 와 있었다. 마을학교를 표방하는 한 대안학교에서 학생들과 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이었다.

그의 강연은 주로 학생들에게 ‘지식보다는 지혜를, 생생한 삶에서 배우는 공부를,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라는 이야기였다. 강연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3.11 이후 후쿠시마 현장에서 보았던 증언이다. 쓰나미에 쓸려서 죽은 후 며칠이 지난, 말 그대로 물고기 밥이 된 훼손된 시신들을 바닷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인양하는 자원봉사자 이야기였다. 근처 대학에 다니는 학생인 젊은이가 그렇게 열심히 찾아 올린 시신은 머리가 없거나 부패한 상태라, 막상 가족에게 인도하면 고마워하는 분도 있었지만 오히려 화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그 일을 한 것은 무엇인가 돕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끝난 후 이 청년은 심각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소위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한다.

시신 인양작업을 하면서 본 끔찍한 현장의 지옥도가 반복되는 악몽이 된 것이다. 그에게 정신과 의사가 준 처방은 약물 복용이었다. 청년은 약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약을 먹는다면 자기가 한 행위가 잘못된 일처럼 되는 것이 아닌지, 그것이 죽은 분들에게 모독이 되는 것 같아서 그냥 견디기로 했다는 것이다. 약물에 의지하지 않고 고통을 대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다는 트라우마의 고통을 그는 정면으로 마주했던 것이다. 나는 그날 강 교수의 이야기에서, 그가 「고민하는 인간」에서 소개한, 빅터 에밀 프랭클의 ‘호모 페이션스(Homo patience, 고민하는 인간)’의 실체를 떠올린다.

행복을 추구하고 누리는 것이 근대이후 삶의 목적 제 1순위가 된 마당에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되었다. 고통을 완화하는 것이 치유가 되어 힐링, 자기성찰조차 상품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신이 죽은 후 최고의 덕목은 건강이 되었다는 세상이다.

강상중은 나스메소세키 ‘읽기’를 계속한다. ‘다갈색 공기로 가득 찬’ 영국을 따라가는 근대일본을 회의적으로 고민하던 소세키가 참조했던 윌리엄 제임스의 두번살기(twice-born)이야기를 꺼낸다. 두번살기는 한번살기(once-born)과 대조되는 말이다. 강 교수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은 생사의 갈림길을 헤맬 정도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빠져나간 지경에 도달하고 세계의 새로운 가치라든가 그때까지와는 다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건전한 마음’으로 보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번 태어나는 형(once born)' 보다는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사는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121쪽) 


즉, 현재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형이 한번살기라면, 절망으로 고민하는 거듭나기가 바로 두번살기인 것이다. 강상중은 책의 초반에 ‘우리가 추구해 마지않는 행복(돈, 애정, 건강, 노후와 같은 평범한 것들)이란 것이 무엇인가’하는 의심으로 시작해서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행복이라는 것은 애초에 구할 수 없고, 구한다고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 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190쪽)


‘미증유의 절망’에서 거듭나기

저자가 ‘미증유의 절망’이라고 표현한 2년 전 동일본의 진재(震災)가 종말론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스메소세키의 <열흘 밤의 꿈(十夢夜)>의 여객선에서 뛰어내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속편에서도 다시 언급한다. 혼란 속에서 여객선를 타고 가던 남자는 바다로 뛰어 내린다. 하지만 그 선택을 실행한 순간 ‘배에 있을 걸’하고 후회한다. 저자가 “배를 타고 가는 것도 불행, 뛰어내리는 것도 불행”이라고 한 남자는 바로 우리 자신일 것이다.

저자는 미증유의 절망 앞에서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묻고, “운명은 받아들이고 인위는 극복하자”고 한다. 그는 과학의 역할을 의심하고 과학을 반성하자고 한다. 개인의 거듭나기를 통해서, 그리고 ‘다갈색의 공기’에서도 희망을 찾아보자고 한다.

“우리는 때때로 이중의 잘못을 저지릅니다. ‘자연은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회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만’과 ‘태만’의 조합이라고 할 까요”(154쪽)


그런 이유로 저자는 소세키의 100년 전 호소를 반복해서 다시 인용한다. “나쁘니까 그만 두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눈물을 머금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미끄러져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자각적으로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 허투루 보았던 에른스트 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최근에야 다시 발견했다는 저자의 고백을 보고, 경제성장을 지극한 선으로 믿는 성장교(成長敎)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권유를 읽고 나는 후쿠시마 재앙 이후 나를 본다. 그의 고민이 나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는데 위안을 얻었다.

계속해서 다시 말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일 것이다. 그 것이 강상중 교수가 다시 고민하는 인간을 말하는 이유이리라. 끝으로 아직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리고 있을지 모르는 청년을 생각해본다. 그가 평안해 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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