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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책 저런책] 애도를 잊은 학교, 믿음이 필요한 사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 12. 11. 10:32

애도를 잊은 학교, 믿음이 필요한 사회


글 홍순성/ rosaleo@naver.com

 


 

『그리고 학교는 무사했다』
- 학교폭력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들
한낱/이계삼/엄기호/진냥 외
(교육공동체 벗, 2013)

 


2011년 대구 아파트에서 한 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아이의 유서는 “제가 그동안 말을 못했지만”으로 시작한다. 자신이 누구에게 어떻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폭로하고 난 그의 유서는“엄마, 아빠 사랑해요”로 마친다. 


2013년 통계청이 발표한 청소년(13~24세) 관련 통계에 따르면 ‘지난 1년간 한번이라도 자살을 생각해본 청소년이 11.2%라고 한다. 청소년 사망원인 1순위는 고의적 자해(자살)이며 2011년 인구 10만명당 13.0명으로 10년 전 7.7명에 비해 크게 늘었다. OECD 1위의 자살율(인구 10만명당 31.2명, 2010)을 기록하는 대한민국에서 또래들에게 시달리다 죽음을 선택한 대구의 한 학생의 유서는 잠시“그런일이 있었어?”하는 반응을 남겼을 뿐이다. 그리고, 학교는 무사했단다.

 

오늘의 학교

『그리고 학교는 무사했다』(교육공동체 벗, 2013)는 격월간지 <오늘의 교육>에 실린 학교폭력 특집을 중심으로 새로 펴낸 단행본이다. 오늘의 학교에서 학교폭력은 어떤 상황인가.

 

필자들은 기본적으로 학교폭력이 학생들의 폭력이라는 교육당국의 단정을 부정한다. 개인적으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상당한 수의 학교 폭력 사건들 중 수십 년이 흘러도 깊은 인상으로 남은 광경이 있다. 같은 반의 급우의 뺨에 신고 있던 슬리퍼를 휘두르던 담임교사의 모습이다. 왕따 문제를 사소하게 보거나 학생의 물리적 폭력을 면죄하려는 뜻은 내겐 없다. 다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관점이 학생들 간의 문제로 축소되거나 봉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학교폭력 담론의 현실은‘가해자와 피해자’프레임으로 이야기 되거나 일진의 폭력으로 치환된다. 일진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는 컨설팅 서비스(학교폭력예방지도사, 학교폭력상담사, 학교폭력예방강사 등)가 새로운 사설자격증으로 떠오른다.(179p) 심지어 “자녀보호안심어플”을 스마트폰에 깔고 왕따부터 폭력까지 모니터링 하라는 광고도 공공연하다. 하지만, 이렇게 재빠른 ‘학교폭력의 상업화’를 비난하기 전에 정작 사건의 현장인 학교가 무엇을 하고 있나 질문이 생긴다.

 

애도 없는 학교

애도(哀悼) 없는 학교. 정작 학교에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 없다고 한다. 학교는 흔적을 지우려 할 뿐 애도하지 않는다. 2011년 대구, 학교 당국자는 꽃 한송이 바쳤냐는 질문에 그 학생을 영웅으로 만들 일 있냐고 반문했다. 교육당국이나 학교 뿐만 아니라 전교조와 같은 교육단체도 마찬가지였다며 “죽음을 지우려고만 하는 공간에는 애도가 없다”고 한다. (엄기호, 「애도하지않는 학교」, 책 23p)

 

전직 교사였던 이계삼에 따르면 학교는 폭력의 숙주로 존재한다. 그가 묘사하는 오늘의 학교는 우울하다. 하지만 학생, 교사, 부모의 상태를 거칠지만 명확하게 내린 진단으로 읽는다.

 

“우리는 날마다 힘 있는 이가 힘없는 이를 착취하고 두드려 패고 배제시키는 폭력을 지켜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견디다 못한 이들의 죽음의 행렬 또한 말 없이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덤덤하다. 이 덤덤함은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면서 그저 내 곁에서 이 일이 안 벌어지기만을 바라는 기대일 따름이다.”

(이계삼,「학교, 폭력의 숙주: 학교폭력의 인식론적 회로를 더듬다」, 책 29p)

 

일상의 폭력과 이에 대한 무력감은 학교폭력만의 문제인가. 학교폭력은 사회폭력이 차단, 여과 없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라는 의심에 공감한다. 그런 폭력을 목도하는 우리는 덤덤하다. 무감각하다. 무감각의 원인은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올 것이다. 그리하여 그저 내 곁에서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설사 문제가 생겼다하더라도 흔적을 지우거나 빨리 봉합하여 버리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학교는 무사할 수 있는 것이다.

 

엄기호는 정말 중요한 것이 경청(敬聽)이라 한다. 유서를 통해서 폭로하기 전에, 제대로 들어야 한다. “그 사람이 입으로 말하는 말만 듣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몸이 하는 말을 듣는” 경청을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폭력으로 생기는 개인의 고통을 공적(公的)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애도의 기간을 갖자고 한다. 애도와 애도의 의례를 하면서 비로소 살아남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다. 뼈저리게 겪으며 통곡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학교라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

한낱은 학교폭력의 해결책으로 시도되는 “보호, 양육, 교육의 이름으로 행한 수많은 조치들을 바닥부터 의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학교 폭력을 ‘안전’의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도 의심한다. 그것들조차 은밀한 폭력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리하여 “멈춤과 비움의 시간동안 애도하고, 사유하고, 질문”할 때, 갈등과 혼란의 시간 속에서 진짜 대안이 태어날 기대를 한다. 결국 청소년 스스로의 힘을 믿어야하며, 구성원들 사이의 도덕이 아닌 연대의 문제로 풀어야한다고 주장한다.(한낱, 「폭력의 반대말은 안전입니까?」, 책 258p)

 

진냥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학교라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학교 폭력의 대책이라고 한다. 동감한다. 학교라는 생태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분노로 폭력을 선택”하는지 이해하고, “학생들과 학교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결국은 학생들에 대한 신뢰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실 우리는 이 폭력적인 학교교육의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이계삼의 고백이 와 가슴을 쩌릿하게 한다.

 

 “그저 지켜봐 주는 것,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은 일들에 작은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의 대강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의 교사로서 부모로, 한 사람의 뜻있는 시민으로 지내는 시간은 기본적으로 고통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주고받고 공감하는 그 언어들 속에서 다른 행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계삼,「학교, 폭력의 숙주: 학교폭력의 인식론적 회로를 더듬다」, 책 46p)

 

학교라는 사회를 변화시켜 평화적 공간으로 만드는 책임은 누구의 것일까. 그것이 온전히 교사의 몫일 수 없다. 교사와 학생들의 공간이지만 결국 부모들/시민들의 사회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교사에 대한 믿음, 학생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한명의 부모로서, 한명의 시민으로서 개인의 성찰과 함께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노력에 따르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지 혹은 그럴 준비가 되었는지 스스로 묻는다. 여러 좋은 글이 담긴 책을 주마간산으로 소개하는 것 같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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