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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의 감성으로 통일을 그리는 청년미술집단 "그림공장" 본문

희망이야기/그곳에 희망이 있다

아날로그의 감성으로 통일을 그리는 청년미술집단 "그림공장"

기념사업회 2003. 11. 1. 15:08


언제부턴가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이들을 '386'세대 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정치.사회적 의미가 있든 없든 간에 80년대 청년이었던 그들도 이제는 이 사회의 기성세대가 되어 가소 그 뒤에는 또 사다른 세대의 청년들이 있다. 이른바 90년대를 '한총련세대'라 부른다면 하나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거북함을 드러낼지도 모르겠다. 또한 '운동'에 오랜 경력을 가진 이들 중에는 90년대를 산 '청년학생' 들을 그저 가볍게만 보는 이도 있겠지만 애정 어린 눈빛으로 이 청년들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림'으로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청년미술집단 <그림공장>은 80년대 유행처럼 번진 민중미술의 희미해진 끝자락을 옹골차게 움켜쥐고 있다고 하겠다.

"운동의 역사에서 민중미술이 담론에서 제외되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희 공장처럼 처음에 3~4명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10여 명이 되니까 자연스럽게 영역도 늘고 늘어난 사람 수 만큼 여럿이 모이니까 힘과 지혜가 모이면 큰 줄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림공장>의 기획부장을 맡고 있는 심상진 씨는 '그림'에 대한 공장의 역할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반전평화와 통일로

이들이 그림을 통해 세상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반전평화와 통일이다. 이미 지난 2000년 <매향리전> 부터 기획전시를 시작해 <점령군>(01), <행복한 통일>(02), 그리고 지난 달 치룬 <청산전>(03) 까지의 주제가 모두 이와 관련된 것이다.

"통일문제나 반전문제,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미술언어를 통해 시민들에게 다가가조자 하는 거죠. 우리가 그리는 그림, 기회하는 전시가 시민들을 만났을 때 호소할 수도 있고 또한 우리의 의지를 공감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걸고 같이 갈 수 있지 않겠어요?"

해마다 치루는 이 기획전에 직접 참여하는 <그림공장> 식두들 말고도 민중미술을 하는 젋은 작가들에게도 이 전시는 의미가 있다. <매향리전>의 경우는 20여 명의 작가들이 직접 매향리에 들어가 며칠 동안을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삶을 경험하고 난 후에야 작업을 시작한다. '전시왕' 이란 제한된 틀 속에 작품을 끼워넣는 것이 아니라 '매향리' 라는 지역이 전시장이 된것이다.

미술집단 <그림공장>에서는 일년에 한 번 있는 이 기획전이 가장 큰 사업이다. '사업'이라 하면 '이익'이 돌아와야 하겠지만 이제까지 이들의 전시내용으로 보아서 그야말로 '돈'이 될까 싶다. 이들의 수익을 어는 길은 노조단위나 큰 행사에 걸개그림을 만들어 주거나 혹은 무대행사의 소품을 제작하는 일 등이다. 한 번은 범민족대회에 무대소품을 만든 것을 보고는, 한 행사 관계가자 맘에 든다며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중가수의 콘서트에 소개시켜 작업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단단. 물론 잘하기도 했지만 '참신성' 에 점수를 더 주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이들의 모습에서 뽐내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함' 이 내 비친다.


"물론 미대를 다녔으니까 그림은 그렸죠. 졸업 후에 진로 고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림으로 통일운동을 하자고 생각이 모아졌죠. 그러면서 99년도에 이한열 열사 추모문화제에 걸개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곳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범민련 부의장 김양무 선생 장례식 때는 자연스럽게 이 길이구나 생각했죠"

이들이 <그림공장>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 이유다.

"저희는 지금 우리 민족이 처한 분단이나 이라크파병 문제, 이런 것들은 민족의 자주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민족문제는 결토 현재 남북의 문제만은 아닌데 6.15공동선언의 시점이 통일의 수순을 밟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저희는 통일을 준비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라며 "한총련은 당연히, 정말 당연히 합법화 돼야죠. 이 문제는 우리 사회가 '포용'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한계를 갖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겁니다."

열리 그려도 하나가 그린 것 처럼

집회 장소나 행사 무대 전면에 커다랗게 배경이 되었던 수많은 걸개그림들은 그날 집회에서 하나의 구심점을 이끌어낸다. 대형 걸개그림을 그릴 때의 과정이 궁금했다.
걸개를 그리기 전에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모여 신중한 토론과 논의를 거친다. 단순히 10분의 1로 긋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누가 그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집회의 성격과 중심을 어디에 두어서 어떤 내용으로 갈 것인가 등에 대한 논의다. 이 때 선정된 주필(대장)은 그림을 그리는 모든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역할을 맡아 한다. 그리고는 합의된 내용에 기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 이들이 그림을 그렸을 땐 토론시간이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거 길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의 성향을 너무도 잘아니까 불필요한 소모적인 논의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럿이 하는 작업이니만큼 그만큼 작업하는 이들의 '호흡'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걸개그림 그리는 거 직접 못 보셨죠? 큰 걸개 위에 앉아서 그리는 모습이 어떤 줄 아세요. 그거 있죠. 특히 뒷모습은 모내기 하는 모습 같아요. 개개인들은 앉아 있으니까 모르는데 뒤에서 쳐다보고 있으면 진짜 재밌어요. 그런 그림을 한 번 그려보는 것도 어떨까 생각도 해요"

심상진 씨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전진경 씨를 보며 넘어가듯 깔깔 웃는다. 억지로 떠밀려서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거나 그림을 그려 업을 사는 이들은 아마도 이들처럼 행복한 미음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못할 것 같다. 정말로 이것이 이 청년들이 말하는 '우리가 가야할 길' 이기 때문에 즐거워서 그래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림공장>이란 이름이 어찌 나왔냐 물었더니 그 답이 너무도 정직하다. 끊임없는 생산의 현장인 '공창'처럼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이름이 맘에 든다는 나의 말에 심상진 씨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를 말해 준다.

"한 번은 엄마랑 통화를 하는데 어디 가냐고 묻길래 제가 그냥 '공장' 간다고 했거든요. 작업실이란 말보다 저희는 공장이라고 하니까 습관처럼 공장 간다고 했죠. 그랬더니 나중에 엄마가 대학까지 공부시켜 놨더니 무슨 공장엘 가냐고 난리가 나신 거예요. 그래서 그때 <그림공자> 해명 하느라 웃지도 못하고 근데 우리 부모님들이 대부분 '공장' 이란 것에 그리 익숙하진 않으시니까요."

'한총련세대' 의 민중미술

이들이 미술집단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동안 그린 걸개그림은 셀 수 없다고 한다. 주문제작을 요청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미 만들어 놓은 걸개그림을 대여해 주기도 하는데 요즘은 지역의 공무원노조들이 가장 많이 대영해 간다며 수백 개의 걸개그림이 창고에 있는데 찾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저희는 80년대와는 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은거죠. 80년대의 투박한 판화 분위기가 아닌 밀도가 높고 생감이 밝고 사질적인 묘사를 하려고 해요. 지난 2001년 봄에 있었던 범민족대회 때 만든 통일걸개가 저희의 색깔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인데 인물표현에 있어서 밝고 참신한 채색이었다는 평가가 있었죠."

<그림공장>은 현재 하고 있는 걸개그림 작업은 물론이지만 전시기획이나 무대제작, 웹플래시 작업도 하고 있다. 앞으로 제 3세계의 젊은 작가들과 공동 전시기획을 하는 것도 추진하고 싶다는 말도 전했다. 서울 시청 앞, 87년 6월항

쟁과 2002년 월드컵에 가슴 졸이던 두근거림의 경험을 기억하며...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38선의 철조망이 끊기는 순간 초대형 걸개그림을 만들어 하나 된 민족에 보이리라. 통일의 바램을 소원하는 청년 미술집단 <그림공장>이 통일을 맞는 순간에 꼭 하고 싶은 일이란다.

미술집단 <그림공장>이 만들어 내는 대형걸개그림이나 현장 그림들을 구매하는 이는 많지 않다. 자본주의 논리로 말하자면 시장구조에서 상품성이 떨어져 팔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청년이다.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는 말.

그들의 당당한 모습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2003년 11월호 희망세상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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