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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언론의 사회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본문
죽은 언론의 사회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글·송기역 songazz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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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정동익은 오래 전 자신이 몸 담았던 동아일보사 앞에 서 있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동아일보는 쓰레기다!”라며 야유를 보냈다. 한때 국민들이 가장 사랑했던 신문 동아일보는 젊은 시절 그와 동료 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자유 언론’이 아니었다. 그는 차마 더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36년 전의 일이다. 1975년 3월 17일.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기까지 그는 입사7년차의 동아일보 기자였다.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 동아일보사 안에는 시노트 신부와 87명의 사원들이 2층(공무국), 3층(편집국), 4층(방송국)에서 5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이중 2층에 있는 23명의 기자들은 단식중이었다. 새벽 3시 15분. 함성소리와 함께 해머로 문과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문을 부순 폭도들은 서치라이트를 비추고 각목을 휘두르며 진압을 시작했다. 30분 후 공무국이 함락되었고 기자들은 짚차에 실려 혜화동 우석병원에 끌려갔다. 폭도들은 이번엔 3층 편집국으로 향했다. 기자들은‘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낭독하고 사회부 기둥에 걸려 있던 이계익 기자가 쓴 두루마리 족자 ‘自由言論實踐宣言(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렸다. 5층 방송국 역시 6시가 넘어서면서 완전 진압되었다. 일터에서 쫓겨난 사원들은 권근술 기자가 작성한 공동성명서‘폭력에 밀려 동아일보를 떠나며’를 낭독했다. 성명서엔“이제 동아는 어제의 동아가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정동익에게‘그날’의 동아는‘현재’의 동아로 머물러 있다. 그는 현재도 동아가 민중의 소리를 대변해주는 진정한 자유언론으로 거듭나길 바라고 있다. 정동익이 해직되기 두 해 전, 전북일보 편집국장이자 주필로 활동하시던 아버지 정희남도 유신과 함께 불어닥친 언론통폐합에 맞서다 해직됐다. 대쪽 같은 성격의 아버지도 언론계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현재까지 지역 언론의 사표로 존경받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길은 해직 이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정동익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언론계에 발을 내디뎠다. “사회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언론인이 돼서 사회 정의를 펴는데 일조하고 싶었지. 문리대 출신은 언론사 외 몇 군데밖에 취직할 데가 없기도 했어. 시험 보던 날, 운동장에 응시자들이 빽빽하던 게 기억나.” 당시 언론사 시험에 합격하면‘백대일’의 관문을 뚫었다고 말할 만큼 경쟁률이 높았다. 1967년 그는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기자라는 자부심이 오래 가진 못했다. 신문사 안엔 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문화공보부, 중앙정보부, 서울시경, 종로서 등에서 온 각종 기관원들이 지면에 간섭했다.“이 기사 넣어라, 저 기사 빼라면서 일일이 개입해. 제대로 된 언론인 노릇하려고 왔는데 제 역할을 못하니까 자괴감이 들지. 언론인의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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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을 읽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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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21일.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는 분회장으로 장윤환 기자를 선출한다. 장윤환은 그동안 몇 차례 발표한‘선언’을 넘어 당시 생소한 용어인‘자유 언론 (Free Press)’을 가져와 실천 과제로 강조했다. ‘유엔데이’인 10월 24일 오전 9시. 철야농성을 하고 있던 기자들이 편집국 사회부 주변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낭독되었다. 선언문은 다음과 같 은 문장으로 시작한다.“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선언문 전문은 다음 날 동아일보 1면에 보도되었다. 다음 날 동아일보사 현관 앞엔‘기관원 출입금지’라는 경고 문이 나붙었다. 자유 언론‘실천’의 신호탄이었다.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구체적인 자유언론 실천의 방안을 모색했다. 위원회는 매일 지면을 검토하는 모임을 갖고 기사를 분석했다.“저녁이면 조용한 조사부 방에서 기자들이 모여서 지면 토론하고 나서 다음 날 아침 데스크에 항의했어. 그 과정에서 점차 지면이 활기를 찾아갔지.”먼저‘1단 벽’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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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성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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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역_| 『허세욱 평전』과 르포집『흐르는 강물처럼』을 펴냈다. 신부의 삶을 꿈꾸다 명동성당에서 할복 투신한 순교자 요셉 조성만의 삶을 담은 평전을 집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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