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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사료(구술) 이야기

재스민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1. 3. 15. 14:24

재스민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독일인들을 따라 묶음여행으로 튀니지를 여행한 적이 있다. 사하라 사막 베두인 족의 천막에서 하루를 자면서 밤하늘에 별이 무수히 빼곡 했던 것과 밤새 짐승처럼 울던 모래바람 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지나던 도로 여기저기에 서있는 거대한 입간판에는 그들의 대통령 사진이 붙어있었고 심지어 지폐에서도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날파리 가득한 식당에선 가난
하지만 순진무구한 표정의 사람들이 전통 옷을 입고 여행자들에게 재스민 한 묶음을 1달러에 팔고 있었다. 하얀 재스민 꽃은 자운영보다도 작았지만 향기가 얼마나 강하던지 한 두 송이만 꽂아 놓아도 방안에 향이 가득 찼다. 십 수년 전에 입간판과 지폐에서 보았던 그때의 대통령이재스민혁명으로 23년의 장기집권 권좌에서 물러났던 벤 알리 대통령이었던 것을 최근의 언론보도를 보고서야 기억해냈다.



마그레브 지역의 민주화 도미노

재스민혁명이 일어나고 불과 두 달 후인 2월엔 이집트의 무바라크 30년 장기독재가 무너졌다. 그들의 정변에서 1987년 6월민주항쟁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우리 의 감회는 남다르다. 작은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듯 폭압정권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박종철의 죽음이 불씨가 되어 6월항쟁으로 번졌다. 20여 년 전 서울광장에서 의 날갯짓이 아주 조금씩 기류를 바꿔 이윽고 지구 저편 열사의 나라에서 재현된것은 혹 아닐까.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불모지였던 마그레브라 일컫는 북아프리카 와 중동에서의 나비효과로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이 요원의 불꽃처럼 사막을 넘어 이집트로 건너갔으며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해체하고 민주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움직임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알제리로 예멘으로 중동민주주의의 새날을 여는 도미노가 되어 도저한 장강의 물결처럼 흘러가고 있다. 무릇 인간의 역사란 시간과 공간의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는 모든 관계망의 총체라는 것을 저 먼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격변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또 하나 든 생각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권 세우기에나 급급한 미국의 위상이 이미 예전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2011년 이집트 카이로의 시민혁명은 미국의 서서히 허물어지는 패권적 세계지배질서의 종언을 알리는 전주곡은 아닌가라는.


도전 받는 미국의 패권주의

우리의 곡절 많은 현대사에도 미국의 부당한 개입은 많았는데, 그때마다 민중 들은 권력자의 의지에 반해 민족 자주를 외치며 대항했다. 6·3항쟁 또는 6·3시위로도 불리는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운동도 외피는 일본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투쟁이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에 항거하고 동시에 미국의 간섭에 반대하는 의미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3월부터 시작한 운동은 6·3항쟁이라 일컫는 6월 3일에 정점을 맞았다. 개요를 살펴본다.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4·19혁명 정신을 유린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항거는 민정 이양 후 한일회담 반대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1964년 3월 24일의 학생 시위를 그 시발점으로 하고 6·3항쟁에 이르러 정점에 달하였는데 단계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즉 1964년 3월 24일의 고교생을 포함한 대규모 학생 시위로부터 점화되어 4월 17일의 시위를 경과한 초기 투쟁, 5월 20일의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및 5월 25일의난국 타개 학생 총궐기대회와 같이 한일굴욕회담에 대한 반대투쟁이 연합적 성격을 띠면서 본격화되는 시기의 투쟁, 6월 2일과 6월 3일의 격화된 시위와 계엄령 선포로 1964년의 투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결정적 투쟁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박정희 정권 타도비상계엄령으로 눌러

당시의 한일회담은 1961년 6월의 케네디·이케다 회담에 이은 11월의 박정희·케네디 회담의 산물로 단순히 한일 간의 현안문제가 아니라 한·미·일 3국간의 관계에서 의제에 오른 문제였다. 그간의 대일 협상 진행 과정을 비밀 에 부쳐오던 박정희 정권은 1964년 3월에 와서 한일회담의 타결·조인·비준 을 5월까지 모두 마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야당은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 유세에 들어갔고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박 정권 타도를 외치며 경찰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까지 진출,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이날 광주 등 지방 대도시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박정희는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압했다. 이날의 비상계엄은 그 후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군사통치 수법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7월 29 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와 시위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 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 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져 상당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었다.


6·3항쟁의배후엔 미국의 부당한 개입도 한몫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 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사임했으나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은 체결되었다. 6·3항쟁은 직접적으로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지만 넓게 보면 당시의 정치적·사회경제적 구조 아래 산적해 있던 다양한 국민적 요구가 분출된 공동투쟁이었다. 즉 박정희 정권의 폭정에 대한 항의이자 직접적 생활 문제, 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굴욕적 태도와 일본의 팽창주의 및 미국의 부당한 개입 등에 반대하는 민족 자주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무바라크한정치인들에 대한 경종을

정권이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국민들은 최후의 수단 으로 저항권을 직접 행사할 수밖에 없다. 직접민주주의의 현실적 한계가 오늘날 일종의 간접민주주의인 대의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면 거꾸로 대의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못할 때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직접민주주의이다. 광장의 민주주의는 정권의 입장에선 무질서하고 위험하게 보이나 의사당이나 대통령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밀실의 야합에 맞서 싸운다. 정권은 자기보존과 복제를 위해 이기적 유전자를 퍼뜨리는 일에 솔깃하지만 가진 것이 없어 거리낄 것도 없는 광장의 시민들은 심지어 죽음마저 불사하며 자기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동을 하면서 까지 대의를 위해 투쟁한다.


스웨덴식합의에 주목할 때

직접민주주의의 다른 예인 스웨덴의 시민적 합의를 살펴보자. 한국의 삼성 경제연구소가 작년 5월 선진화 지표를 중심으로 OECD 30개국을 조사한 결과 스웨덴이 가장 선진화가 잘 이뤄진 국가라고 발표했다. 참고로 한국은 23위였다. 선진화를 부르짖는 현 정부가 주목해야할 대목은 스웨덴이 선진화의 지상 모델이 된 가장 큰 이유가 스웨덴의 사회복지제도이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스웨덴은 보편적 복지를 세계최초로 도입했다), 이를 가능케 한 제1의 요인이 수준 높은 사회적 합의문화에 있다는 사실이다. 합의 또는 공감이 스웨덴의 감추어진 리더십이라고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끝없이 토론하고 설득하고 협동하고 양보하고 타협해서 동의를 이끌어낸다. 최근 출간된 신필균의『복지국가 스웨덴』에 따르면 합의의 과정을 통해 결정된 사안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구성원의 헌신과 자발성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갈등 탓에 발생하는 지체와 불안정을 사전에 예방해 오히려 시간을 단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와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을 준다고 한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스웨덴식 합의제를 낳은 스웨덴 사람들의 자기인식은중용이 최상이라는 말 속에 요약된다고 한다. 조급하고 과시적인 성과주의에 급급한 우리 정치 사회문화가 차분히 곱씹어봐야 할 내용이 아닐까. 세간에 논의되는 복지문제를 세금이나 예산 등 돈 문제로만 사고하는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무바라크한이들에게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라는 스웨덴 격언을 들려주고 싶다. 이상한파와 이상폭설로 겨우내 얼어붙고 움츠러든 우리의 시린 가슴에도 봄은 오고 있다. 올해는 지구촌 곳곳에서 재스민 향기를 맡을 것 같다. 갈등으 로 점철된 우리 사회도 시민적 합의로 좀 더 성숙한 민주주의의 향기를 내뿜을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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