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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사료(구술) 이야기

겨울 노점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12. 23. 11:05

겨울 노점상

 

글·어수갑 eohsg@kdemo.or.kr

 



가을이 짙어가다가 찬비 후드득 내리면서 거리엔 가득 낙엽이 쏟아졌다. 시간의 흐름은 가혹하리만큼 엄정하다. 무더웠던 지난 여름의 기억을 채 털어버리기도 전에 이제 계절은 돌이킬 수 없다는 듯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거리를 걷는 이들의 발길이 빨라지는 계절인 것이다. 겨울을 준비하는 손길들 또한 덩달아 바빠지는 때이다. 조정래의 『한강』은 한 겨울의 스산한 풍경을 서술하면서 대하소설의 첫 문장을 시작한다.

"새벽 어스름이 스러져 가고 있는 한겨울 들판을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밤새 무성하게 돋아난 서릿발로 세상은 싸늘하게 얼어붙고 있었다. 발가벗은 미루나무의 앙상한 잔가지들이 바람에 쓸리며 춥게 떨고, 벼 그루터기들만 남은 들녘은 폐허처럼 황량하기만 했다. 어스름 저편으로 아슴푸레하게 먼 야산도 추위에 웅크린 듯 초라했고, 그 품에 보듬긴 마을은 깊은 적막에 묻혀 있었다."

이제 그런 겨울의 세계로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무릇 12월은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준비하는 달이다. 그리고 차가운 밤하늘의 명징한 고요함과 송년의 시끌벅적함, 한 해의 소출을 마친 풍요로움과 헐벗은 나뭇가지의 빈한함, 칼바람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어두운 거리와 따스하게 덥혀지고 불빛으로 아늑한 방안처럼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하나로 겹쳐지고 융화되는 때이기도 하다.

기억의 뒷켠에 묻힐 한 해가 다 가버린다는 상념으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다가올 새로운 한 해에 대한 대책 없는 기대로 연말의 거리는 언제나처럼 바쁘고 을씨년스럽고 흥청거리며 떠다닌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 누구나 쓸쓸하다.

스산한 겨울 지켜주던 포장마차의 기억

청춘의 수많은 저녁 무렵을 포장마차라 불리우던 노점상에서 벗들과 혹은 사랑했던 사람과 혹은 혼자서 보냈을 것이다. 카바이트 등불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며 어둠을 겨우 밝히면, 뜨거운 멸치국물에 국수 한 그릇 말아 먹고 소주로 몸을 덥히던, 오로지 취하기 위해 마시던 시절이었으니 취하지 않으면 맨 정신으론 버티기 힘들던 동토의 겨울공화국. 그 어두웠던 시절을 품어준 노점상은 애련한 기억으로 내게 남아있다.

그러다 한국을 떠나 낯선 이국땅에서 맞은 전혀 다른 축제분위기의 노점상들은 내게 많을 걸 생각하게 했다. 성탄을 앞둔 대림절의 크리스마스 시장은 대개는 도시 중심부 시청 앞 광장에 엄청나게 큰 규모의 장으로 서는데, 형형색색의 불들이 밝혀진 가운데 크리스마스 트리에 필요한 각종 초나 수공예품, 치즈와 소시지 등의 농축산품 그리고 각종 스낵과 글뤼바인이라 일컫는 계피와 설탕을 넣어 끓인 따끈한 레드와인, 구운 과자와 사탕과 초콜릿뿐만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장난감 등 온갖 것들이 노점에 나왔다.

구청에 신고하고 약간의 장소임대료만 지불한 평범한 시민들이 작은 포장마차 하나를 운영하는데, 그런 점포 수백 개가 불야성을 이룬다. 노점상은 정부의 적극적인 보호와 장려에 힘입어 주말시장의 형태나 각종 페스티발을 기념하기 위해 거리와 광장에서 열리는데, 베를린의 가장 번화한 쿠담거리의 경우 1년에 4백만 명 정도의 시민과 관광객들이 노점상을 애용한다고 한다. 노점상을 귀찮은 단속대상으로 여기는 한국과는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동안 필자가 속해 있던 한 단체에서는 매년 겨울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만두와 잡채 등을 팔아 얻은 제법 많은 수익금을 전태일기념사업회를 비롯한 국내 운동권과 인권단체 지원에 사용했었다. 나는 그곳에서 시린 손을 부비며 음식을 만들거나 파는 동안 종종 내가 다녔던 서울거리의 포장마차를 떠올렸는데, 내게 술 좀 그만 마시라며 뜨거운 국물을 퍼주시던 주인아주머니와, 설거지를 도와주던 여린 중학생 딸과 반신불수가 되어 병석에 누웠다던 아저씨의 안부를 궁금해 하곤 했었다.

온 국민 사랑받는 유럽 노점상 vs. 철거와 단속대상인 한국 노점상

얼마 전 호들갑스럽게 열렸던 G20 개최 기간 동안 코엑스에 입주해 있던 상점은 거의 다 개점휴업을 했다고 한다. 강남의 골목골목에 즐비한 술집들조차 골목마다 차고 넘친 경찰에 지레 주눅들은 탓인지 거의 매상을 올리지 못했다고 할 정도이니, 노점상은 말할 나위가 없다. 코엑스 주변은 물론 서울 곳곳의 노숙인과 노점상들이 환경미화 차원에서 국격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철거됐다. 차디찬 시멘트 건물만으로 획일화된 거리는 깨끗할지언정 사람 사는 따스함이나 여유는 보이지 않는다.

대개는 도시빈민들인 노점상들이 경찰이나 지역 깡패들의삥뜯기등의 착취와 강제철거로부터 생존권을 찾아 투쟁에 나선 역사는 제법 오래 되었다. 노점상들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비롯한 국제행사 때마다환경미화와거리질서확립이라는 미명 아래 폭력적 강제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그보다 앞선 1983년 노점상의 생계를 위협하는 강제단속은 IPU(국제의회연맹) 총회 개최당시 한 노점상의 죽음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노점상 1,500여 명이 시청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는데, 이것은 최초의 노점상들의 연대투쟁으로 조직적인 노점상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도시빈민 노점상, 생존위해 투쟁에 나서다

전두환 정부는 1986년 아시안게임을 맞이하여 노점상들을 강력하게 단속했다. 노점상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86년 12월 29일 도시노점상복지회를 결성했고, 이 단체는 6월항쟁 직후인 1987년 10월 19일 도시노점상연합회(도노련)로 개칭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기점으로 노태우 정권이 다시 노점상을 탄압하자 그 간의 투쟁조직을 강화시킨 도시노점상연합회는 대중적 차원에서 노점상 탄압 반대투쟁을 준비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면 단속 예고가 내려지자 1988년6·13 생존권 수호 결의대회를 개최했고, 이를 통해 전국조직 결성을 모색했다. 도노련은 사업방식을 대중적으로 전환하고 조직을 부산, 광주, 원주, 제주 등 전국 단위로 확대해 1988년 10월에 전국노점상연합회(전노련)를 결성했다.

전국노점상연합회는 노점상의 생존권 쟁취, 도시빈민과 노점상의 발생 원인 및 잘못된 사회경제구조 개혁과 사회안전망 확보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노점 단속에 대한 대응과 노점상 간의 상호부조, 손수레 규격화, 자율질서사업, 지역공동체 사업 등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정부는 1989년 4월 노점상 전면단속 조치를 내렸다. 이에 전노련은 단속저지투쟁과 백만 노점상 생존권 완전 쟁취 결의대회등을 개최하고 명동성당에서 철야농성을 벌이면서 7, 8월 노점상 투쟁의 서장을 열었다. 이후 1990년 노점상 자립법 제정 촉구 활동과 1992년 도시빈민 생존권 결의대회 개최, 3·24총선에 후보 출마,노점상 자립 합법화 공동추진위원회구성과 1993년노점상 자립 합법화 청원운동등을 꾸준히 전개해갔다. 그들은 또한 1989년 11월 11일 전국빈민연합과 1992년 7월 전국도시빈민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

기념사업회 사료관에는 노점상 관련 약 350여 건, 도시빈민 관련 약 1,100여 건의 관련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비탈에 선 모든 이들을 위하여

외국 손님을 웃는 얼굴로 맞이하자며 자기 국민들을 성난 얼굴로 다그치거나, 발전된 모습만 과시하려고 달동네 등 낙후 지역은 담장을 쳐서 가리고 도색(塗色)하는 그런 사고방식의 소유자들로 인해 정작 보호받아야 할 밑바닥 서민들은 가려지거나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그들만의 나라일 뿐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기기 전에 노점상과 노숙인과 실업자와 비정규직과 독거노인 등 자본과 제도와 권력에서 소외된 모든 이웃들의 고통과 절망에 귀기울여봄은 어떨까.

로버트 투르번스타인은 『생각의 탄생』이란 책에서 "위대한 통찰은 일상적인 것의 숭고함(sublimity of the mundane) 즉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는 매우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감지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온다."고 썼다. 내년에는 거대담론이 아닌 우리네 생활 속의 소소한 일상적인 것들과 이 시대의 모든 비탈에 선 이들로부터 희망의 실타래를 감아보고 싶다.

글·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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