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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지켜낸 1977년의 서울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11. 16. 11:07

타는 목마름으로 지켜낸 1977년의 서울대
-김경택 그레이트북스 대표

 

글·이창훈 dinarihanmail.net

긴급조치 9호와 1977년

"당시 젊은 청년학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런 속에서 자기가 학업을 계속한다는 것에 대한 어떤 모멸감 같은 것을 굉장히 많이 느꼈었거든요. 학교를 다니면서도 굉장히 괴로워했어요. 그러니까 그 괴로움을 술로 달래고…"

당시 서울대 국사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김경택은 긴급조치9호로 인한 타는 목마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소리를 한 마디도 낼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긴급조치9호는 자유로워야 할 상아탑을 감옥으로 만들어 놓았다. 수백 명의 경찰들은 학생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정복을 입지 않은 채, 학내에 상주하면서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가을을 맞이한 1977년 2학기의 서울대학 교내는 관악산을 따라 내려온 오색단풍이 아름답게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루하루 긴장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긴급조치9호가 발표된, 1975년 5월 13일 이후로 대학가에서는 간헐적인 시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나, 사회적 파급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벌써 3년째 대학가는 침묵 속에 접어들고 있었다. 70년대 초반의 민청학련 운동을 눈으로 보고 학생운동에 참여한 74학번들은 더더욱 답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1977년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시기였다. 그러던 중 서울대를 발칵 뒤집어 놓은 게다가 이후 학생운동의 전형을 바꾸게 되는 획기적인 사건인 1977년 11월 11일 민주구국투쟁선언문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77년 10월의 서울대 심포지엄 사건

70년대의 대학가 축제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요즘 대학가 축제에서는 메인 행사에 대중가수를 누구를 불러올 지를 결정하기 위해 인기투표까지 한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실종된 70년대의 대학가의 축제는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장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이 시기에 대학가 축제 행사 중에는 심포지엄이나 토론회 초청강연회 등이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긴급조치로 인해 한층 긴장감이 돌던 서울대 77년 2학기 축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학과에서 1920년대의 민족운동을 주제로 내걸고 심포지엄을 개최하게 된다.

"그때 심포지엄의 주제가 1920년대 한국의 민족운동에 대한 고찰이었죠. 그 당시 민족운동 고찰을 이야기 하는 것은 20년대 민족운동 이야기 이긴 하지만, 조금만 머리를 돌려서 보면 바로 70년대 대한민국 현실에서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생각해 보게 하는 장이 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 주제로 사회학과에서 심포지엄을 열었어요. 그래서 그 장을 통해서 일반대중들한테 운동 시각을 갖춰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나, 이러한 주최 측의 의도를 간파라도 했다는 듯이 경찰은 학교에 압력을 넣어 행사자체를 무산 시켰다. 당일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행사장을 찾은 학생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모를 하는 것도 아니고 현 정부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토론장도 아닌데, 아무 근거 없이 심포지엄을 막은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긴급조치로 인한 불만이 가득한 학생들인데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행사를 진행하지 못하도록 하자 바싹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댕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심포지엄 불허에 대한 항의는 곧 시위로 번져 나갔다. 단순히 행사에 참여하려던 학생들마저도 유신정권 규탄 시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 시위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연행되고 십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서울대 학생들의 자발적인 투쟁을 지켜본 김경택은 고민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동기인 양춘승 등이 감옥에 가는 바람에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대한 서울대생들의 분노를 그냥 두고만 보다가 순순히 졸업장을 받아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간계층의 활동이 양심적인가 비양심적인가라는 사실은 한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거든요. 기층대중 활동은 그들의 경제적 기반, 경제적 이익, 자기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출발한 것이 많다면, 중간계층 활동이라는 것은 그들의 학문적 양심이든, 기자적 양심이든, 법관의 양심이건, 올바른 생각과 사상, 의식과 양심에 기반을 두어서 활동하는 것이 기본일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 하지만 이런 상황까지 좌시하고 묵과하면서 현실을 방기한다면, 내가 역사를 공부해서 교수가 되고, 중간계층 활동을 한다고 한들 그때 가서도 양심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 거죠."

꾹 참고 대학을 정상적으로 졸업한 후에 교수가 되어 진보적인 활동을 할 꿈을 간직했던 김경택에게 젊은 날의 열정과 또 다른 문제인 양심인으로서의 삶이라는 구체적인 화두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같은 대학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장기영이 날마다 찾아와 이걸 그냥 두고 볼 것이냐? 데모를 해야 한다고 매일 같이 주장하는 터이니, 더 이상 고민만 할 때가 아니었다.

성동격서의 민주구국투쟁선언문 사건

그러나 김경택의 고민은 정작 다른 것에 있었다. 그동안 긴급조치 시절의 여러 번의 대학생시위를 지켜본 김경택은 단발적인 시위에 그치는 것을 우려하였다.

"특히 심포지엄 사건을 겪고 나니까 경찰 놈들이 거의 학교 내에 몇 백 명이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구호조차도 못 외치고 잡혀가는 거에요. 그래서 어떠해서든지 시위가 되려면 시간을 좀 끌어야 되는데, 그러려면 일반적인 장소에서는 안 되고 폐쇄된 공간에서 시작을 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중앙도서관에 들어가서 일정한 공간을 밀폐를 시켜놓고, 그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학생대중들을 향해서 뭔가 선전선동을 할 수 있다면 이 시위가 많이 커질 수 있지 않겠냐, 그래야 이게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시위주동자가 한두 명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여섯 명은 동원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데모를 하자고 주장하던 정기영은 참여할 것으로 판단했지만, 나머지 네 명을 모으는 일이 큰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김경택은 그동안 알고 지내던 4학년 동기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광화문 근처 어디에선가 모인 이 자리는 사뭇 결전을 각오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는 혹시 모를 프락치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참여할 결심이 선 사람들은 제2의 장소로 모이라고 이야기 했다. 이렇게 하여 모인 사람들이 김경택과 정기영, 권형택, 양기운, 문성훈, 그리고 일 년 후배인 연성만 등 여섯 명이었다.

1977년 11월 11일, 그날 아침이 밝았다. 시위계획은 이러했다. 학생식당에서 2명이 초동을 떠서 기관원을 끌어 모으고, 다른 2명은 5동 앞에서 시위를 하여 학생들을 모아 도서관으로 이동해, 미리 준비된 농성장에서 장시간 동안 시위를 벌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동격서 격의 시위전술인 셈이다.

시위는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기관원만 끌어 모으려던 학생식당 앞 시위가 예상보다 훨씬 크게 진행된 것이다. 양기운과 문성훈이 동을 뜨자, 경찰들이 득달같이 몰려들더니 양기운의 입을 틀어막고 유인물을 나눠주던 문성훈에게 달려들었다. 이 과정을 지켜본 학생식당의 학생들이 경찰들에게 항의를 하면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학생식당의 소요사태가 금세 학내로 퍼져, 계획대로라면 5동 앞을 지나야 할 학생들마저 바로 학생식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5동 앞 2차 시위를 준비하고 있던 권형택과 장기영은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이를 도서관에서 지켜본 김경택은 시위대를 도서관으로 인도하기 위해 연성만을 식당으로 급파했다. 잠시 후, 연성만과 5동 앞 시위를 주도하려던 장기영이 시위대를 이끌고 도서관으로 들어 왔다. 그사이 학생식당 시위를 주도한 양기운과 문성훈은 경찰에 끌려가고 말았고, 5동 앞 시위를 주도하려는 권형택은 교직원들에게 잡혀 경비실에 갇혀 있었다. 이후 권형택은 주변 학생들의 도움으로 교직원들 손에서는 벗어났지만, 도서관 농성장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 도서관 바깥 시위에만 참여하였다가 길고 고통스러운 수배생활을 하게 된다.

도서관 4층 열람실에서는 400여 명의 학생들이 농성을 시작했다. 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에는 수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날 경찰들이 시위대를 완전히 해산시킨 것은 저녁 7시가 다 되어서였다. 도서관 앞 광장의 수천 명의 학생들을 해산시키고 나서 다시 철문으로 된 열람실을 열지 못하고 벽을 뚫고 들어가 학생들을 연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김경택의 작전은 실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날의 데모소식은 굳이 언론에서 다루지 않아도 이날 시위에 참석했던 수천 명의 학생들의 입을 통해 각 학교로 퍼져 나갔다.

그레이트한 꿈을 갖는 그레이트북스

정지용의 시 고향을 읊기를 좋아하는 김경택은 현재 중견 출판사의 사장으로 있다. 구속이후 1984년에 복학하여 늦깎이 졸업장을 받은 김경택은 이후 출판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웅진, 사계절 출판사를 거친 후, 독립하여 그레이트북스라는 출판사를 차린 것이다. 그 사이 대학원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갖게 되었다.

"사람들한테 늘 이야기를 해요. 내가 왜 이 사업을 하는지, 청년시절 꿈을 이야기를 해요. 나는 청년시절에 이 사회의 혁명을 꿈꾸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혁명을 부르짖고 우리 사회의 정의를 부르짖고 징역도 살았던 사람이다.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에 현재 하고 있는 이 교육사업, 출판사업을 통해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 그러니 나의 뜻에 동의하는 사람은 같이 힘을 합치자. 그냥 돈 벌기 위해 이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갖지 말아 달라. 그런 사람은 다른 회사를 택하라. 물론 열심히 일하면 돈도 벌고 개인의 삶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러니까 이 뿌리는 내 삶에 중요한 층을 이루고 있고 의미가 되고 있어요."

김경택에게 그레이트북스는 중간층운동론을 이야기하던 젊은 시절 꿈의 실체이다. 교수는 되지 못하였더라도 그보다 넓은 영역인 교육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그레이트북스의 성공은 그레이트한 세상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글·이창훈 | 경희총민주동문회 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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