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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은 찢겨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7. 23. 11:48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은 찢겨져

글·어수갑 eohsgkdemo.or.kr

국제노동기구(ILO) 99차 총회가 열린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의 노동 상황을 비판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잇따라 나왔다.
6월 14일 세계 최대 노동단체인 국제노동조합총연맹(국제노련)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에 따르면, 가이 라이더 국제노련 사무총장은 11일 제네바의 유엔 유럽본부에서 열린 국제노련의 ‘2010 노동기본권 연례 보고서’ 출판기념회 겸 토론회에서 “2009년에도 많은 노조 활동가들이 감옥에 남아 있고 수백명이 여기에 합류했다”며 “특히 이란, 온두라스, 파키스탄, 터키, 한국, 짐바브웨의 수많은 노조 활동가들이 체포당했다”고 밝혔다. 이 연례 보고서는 2009년 한 해 동안의 전 세계 노동탄압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다. 라이더 사무총장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국과 터키, 이집트, 러시아를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일반적인 노조의 권리가 악화했다”고 지적했다.
또 라이더 사무총장은 한국과 일본, 인도의 공무원들은 제한적인 노조 권리를 갖고 있으며 파업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국제노련과 ILO 총회, 한국정부에 ‘옐로 카드’
엠벳 유손 국제건설목공노동조합연맹 사무총장도 같은 날 열린 기조연설에서 레미콘 기사 등 한국의 건설 분야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결사의 자유를 침해받고 있다고 한국 정부를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옐로 카드’를 꺼내들기도 했다. 유손 총장이 최근 열리고 있는 월드컵 경기를 반영한 듯, 한국 등의 이름을 부르며 실제로 옐로 카드를 품에서 꺼내들어 참석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시했다고 한다. 이게 웬 망신인가?
한때는 단기간에 민주화를 이룬 나라로 국제사회의 칭송을 한 몸에 받던 우리가 어쩌다가 짐바브웨나 이란, 온두라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제사회의 지탄받는 ‘인권탄압국’으로 변질되었을까.
필자가 몸담은 직장의 비전은 ‘아시아의 대표적 민주주의 연구&발전·통합서비스 기관’이다. 이 말은 우리나라가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민주주의의 모범국이라고 하는 전제와 자긍심에 바탕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가? 지금도 뉴스에선 경찰이 피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입에 재갈을 물리고 얼굴을 테이프로 감고 구타하며 ‘날개꺾기’를 하는 등 고문과 가혹행위를 했다는 인권위 조사결과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현재의 이러저러한 인권역행은 10년간의 민주정부가 민주화를 철저하게 이뤄내지 못한 후과이자 일종의 반동이 아닐 수 없다. 더 천착한다면 6월항쟁 주역들이 당시 노동자들을 위시한 기층민중들의 분출하는 요구를 현실정치 안에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채 독재정권이 던진 몇 개의 그럴듯한 당근에 만족하고 안주했던 건 아니었을까?

‘6·29 선언’, 노동자들에겐 속 빈 강정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6·29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선 노태우의 ‘속이구 선언’이라 일컫기도 했는데, 어쨌거나 이를 통해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 이른바 4·13 호헌조치는 무산되고 국민들이 염원했던 직선제 개헌은 관철되었다. 여권은 민주당 등 제도정치권을 체제내로 끌어들여 선거를 통해 재집권을 실현시키기 위한 유화책을 쓰는 한편, 야권에서는 대권을 향한 양 김 씨의 경쟁과 분열이 본격화되었다. 미국도 안정된 친미정권 수립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정작 어디에도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기층 민중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요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이에 노동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민주노조 건설’,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은 노동조합 불모지였던 현대그룹에서 먼저 일어났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에 성공한 데 이어, 7월 16일에는 ‘현대 미포조선노동조합 결성 신고서류 탈취사건’이 발생했다.

들불처럼 번진 파업투쟁과 이석규의 죽음
현대가 전 국민적인 지탄을 받는 가운데 파업투쟁은 독점 대기업의 사업장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7월 하순 영남권으로 확산된 투쟁은 (주)통일을 중심으로 마산·창원의 대공장을 휩쓸면서, 8월 17, 18일 3만여 명이 참여한 울산 현대그룹노조협의회(현노협, 의장 권용목)의 가두시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후 부산과 거제 등지로 확산된 파업투쟁은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가두시위 과정에서 8월 22일 이석규가 직격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으로 확대됐다. 이를 계기로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이석규를 살려내라’는 투쟁으로 발전했다. ‘이석규 열사 민주국민장’ 당시 인권변호사 노무현, 이상수 등은 ‘장례식방해혐의’라는 희한한 죄목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파업투쟁은 수도권의 중소기업·비제조업 등으로 확산되어 갔다. 하지만 8월 11일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폭력·파괴·불법 행동 비난’과 ‘공권력 개입 요청’을 계기로 정부의 폭력적 탄압과 ‘제3자 개입, 위장취업, 좌경 용공 색출’ 등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강화되었고, 이른바 ‘구사대’라는 이름의 용역깡패들이 사업장에 투입되어 난동을 부렸다. 기업주들은 휴폐업 조치로 대응했고 제도언론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을 왜곡 보도하며 여론을 호도했다. 그리하여 투쟁의 파고는 9월부터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소강상태로 빠져든 8월 말부터 운수·광산·사무·판매·서비스·기술직 등 비제조업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9월 이후 계속되었다.
7·8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노동조합이 새로이 조직되어 1987년 12월 말엔 노동조합수 4,103개(1986년 2,675개), 조합원수 1,267,457명(1986년 1,035,89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1987년의 노동쟁의 3,749건 중 3,341건이 7월과 9월 사이에 전개되었다. 하루 평균 발생건수가 44건으로 1986년 0.76건의 58배가 증가했다. 그리고 노동자대투쟁 기간에 발생한 쟁의 중 76%가 중소기업에서 일어났으며, 비합법투쟁이 94.1%를 차지했다.
1987년 여름의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사회의 공업화, 자본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래 사회변혁의 주체로 등장한 노동자들의 최초의 대규모적이고 폭발적인 진출이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광범한 대중투쟁은 6월항쟁의 성과에 힘입은 것이자 그 부분적 성과를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보완, 발전시킨 민주화 투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운동은 질적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관계’만이 박제된 신화를 넘을 수 있다
노동자대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이석규도 노무현도 권용목도 세상을 떴다. 1987년 그해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제 역사 속에서 박제된 신화로만 존재하는 것인가. 당시 가장 많이 이름이 오르내렸던 살아있는 신화이자 빛나는 노동전사 권용목은 걸출한 노동운동가로 시작해서 민주당을 거쳐 정몽준의 국민통합 21, 이인제 캠프를 거쳐 결국 ‘뉴라이트 신노동연합 상임대표’라는 직함을 끝으로 작년에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극단의 변절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도수 높은 커다란 안경 속 선한 눈매를 생각하면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유전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 그만의 예외로 치부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야말로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많은 우리 한국노동운동사의 외면할 수 없는 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는 적어도 희망은 있었다. 펄럭일 깃발이라도 있었다. 사회주의권 몰락이후 세계화의 유령이 지구를 배회한 지 어언 20년이 지난 지금,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마저 바래고 찢겨졌다.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의 양산, 양극화와 대책 없는 고령화 사회에 내몰린 이 땅을 사는 대다수 서민들의 척박하고 불안한 삶이 망연하기만 하다.
6월항쟁에 이어 노동자대투쟁이 점화되었던 뜨거운 7월, 다시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말들이 있다. 하나는 ‘살아남은 자(Remnant)’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문정현 신부의 말이다. “정권이 바뀌고 시절이 바뀔 때마다 편한 길로 이탈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나를 지키자. 죽을 때까지 내 정체성을 변치 말자’ 기도해왔어.”
또 하나는 권용목과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이갑용 전 현대중공업노동조합 위원장이 권용목의 죽음 즈음에 했던 성찰적 독백이다.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끼리는 서로 지켜줘야 한다. 유혹에 너무 쉽게 노출되는 게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쫓겨난 후에 생활고에 시달리고, 찾아주는 사람 없고, 몸 하나밖에 없는 쇳물 만지던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무릇 스스로 흔들리지 말되, 흔들리는 것 또한 사람의 일이니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고 붙잡아주는 ‘관계’ 속에서만이 약한 자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건 풀잎만은 아니다.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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