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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인간의 본성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4. 14. 16:05

혁명과 인간의 본성

 

 

글·어수갑 eohsgkdemo.or.kr

 


지상에 많은 혁명들이 있었다. 꿈꾸었던 세상은 이루어졌던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4월혁명 50주년을 맞아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질문이다. 그것을 인간의 본성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무소유를 설파하며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살다 간 법정스님은 인간에게 내재한 소유욕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다. 따지고 보면 혁명은 권력을 담당한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에 제동을 걸어 사회구성원들에게 고루 권리를 배분하고자하는 시도였다면, 혁명의 실패 또한 탐욕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권의 실패에서 이미 그것을 경험했다.

한편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 스탠리 밀그램이란 심리학자가 1962년 예일대학에서 행한 이른바 ‘복종실험’이란 게 있다.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일정한 조건 속에서 보이는 불법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통해 밀그램은 “이 실험에 참가한 1천명의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알게 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만일 나치 독일의 포로수용소를 미국에 세운다면 미국의 어느 동네에 가도, 그 동네가 너무 작은 동네가 아니라면 그러한 수용소를 위해 일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권위를 가진 자가 내리는 명령이 잔인하든 부당하든 그 명령을 너무나 기꺼이 따르는 듯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어떤 면에서 원숭이보다 인간이 이웃에 대해 냉혹하다는 실험 결과다.『위험한 호기심』이란 책에 의하면 시카고의 한 연구팀이 우리에 붉은 원숭이들을 가두고 먹이를 원하면 사슬을 잡아당기도록 했다. 하지만 함정이 있었다. 사슬을 잡아당기면 이웃한 우리에 갇힌 원숭이에게 고주파의 전기충격이 가해졌다. 이웃의 고통을 목격하자 대다수 원숭이들은 사슬을 다시는 잡아당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다른 원숭이에게 고통을 가하는 대신 12일 동안이나 굶었다. 물론 인간들은 그렇지 않았다. 다시 말해 원숭이들은 대부분의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위의 실험결과가 말해 주는 것은 인간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끝없이 잔인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간본성에 대한 우울한 결론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롭거나 선하기는커녕, 강자독식과 생존의 처절한 고통으로 넘실대는 가없는 바다임을 말해 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간에 내재해 있는 이기적 본성만이 전부라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팍팍할 것인가. 이웃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동참하고 불의에 저항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이들이 존재하기에 우리의 삶과 우리가 일궈내는 역사가 좀 더 가치 있는 것이 되는 게 아닐까. 비록 부당한 권위에 저항한다는 것이 밀그램의 실험이 보여주듯이 평범한 우리에게는 실로 몹시 어려운 일이겠지만 말이다.

4월혁명을 통해 우리는 불의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전제주의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자부”하며 “깜깜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4·19 서울대 선언문 중)들을 만나게 된다. “일부 몰지각한 자의 선동과 사주에 망동하여 소요행위를 자행”(서울지구 계엄사령관 포고문 제1호 및 2호 중)하는 ‘이적행위자’라는 이승만 정권의 겁박에 대해 그들은 “데모가 이적(利敵)이냐, 폭정이 이적이냐”라는 플래카드와 구호로 결연히 맞섰다.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같이 1948년 정부수립 이래로 이승만 정부는 친미와 반공만을 앞세운 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제왕적 통치를 일삼았다. 반민족 친일행위에 대한 단죄를 목적으로 1948년 10월에 발족한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고,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부패특권 세력에 부를 편중시킨 독재 정권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종신집권을 꾀한 ‘사사오입개헌’을 자행하고 정적제거를 위해 ‘진보당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 처형 및 언론자유를 정면에서 말살한 경향신문 폐간 등 끝없는 반민주주의적 폭거를 자행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 1960년에 일어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와 규탄에서 시작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4·19혁명은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에서부터 시작하여 3월 8일 대전에서의 학생 시위와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 당일의 3·15 제1차 마산시위, 그리고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4월 11일의 제2차 마산시위, 4·18 고려대생 시위에 이어 절정에 이른 4월 19일의 대규모시위와 4·25 대학교수단 시위 등으로 숨가쁘게 전개되었다.

시위 숫자나 사상자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낸 『민주화운동사 연표』를 참조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 4월 19일 아침 신문을 펼쳐 본 학생과 시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1면 머리기사로 4월 18일의 고려대생 시위에 대한 상보가 실려 있고, 깡패들의 시위대 습격 전말이 사회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전 8시 30분쯤 선언문과 격문을 보던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대광고교생 1천 여 명이 경찰의 바리케이트를 넘어뜨리고 함성을 지르자 9시 20분경 교문을 나서 부근에 있는 법대생, 미대생들과 합세했다. 10시 30분경 3천여 명의 서울대생들이 현재의 서울특별시의회인 국회의사당 앞에 모였고, 뒤이어 서울대 사대와 상대, 건국대생들이 달려왔다.

동성고 학생들과 고려대생도 나왔다. 동국대생 2천 명이 11시경 쏟아져 나온 것을 비롯해 연세대, 중앙대 등 여러 대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의대생들은 흰 가운을 입고 나왔다. 중·고생들도 속속 참여했다. 11시 50분경 동국대생들이 중앙청과 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현 청와대)쪽으로 향하면서 시위 양상은 바뀌었다. 다른 대학 학생들과 동성고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때부터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나왔다. 실업자,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도 시위대에 합세했다. 오후 1시 40분경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일제히 발사해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다. 2시 50분경에는 중앙청 부근 무기고에서 경찰의 무차별 발사로 8명이 숨졌다. 시위대가 이기붕 국회의장 집으로 몰려들기 직전 이기붕은 6군단사령부로 피신했다. 2시 반경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늘어나 서울 시내 주요 거리는 시위대 물결로 뒤덮였다. 5시 이후에도 광화문에서 세종로, 서울시청 일대에서 경찰과 시위대 간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에 불이 치솟는 등 건물 26개소가 파괴되었다. 이날 시위로 서울에서 104명이 사망했다.
이승만 정부는 2시 40분경 서울 일원에 경비계엄을 1시로 소급해 선포했다. 4시 반에는 부산·대구·광주·대전에도 경비계엄이 선포되었고, 5시에는 서울 등 5개 도시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에도 곳곳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 4월 19일의 시위는 거의 전국적인 규모였다. 부산에서는 경남공고, 데레사여고, 부산상고 등 고교생의 데모가 일어나 시민들과 합세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는데, 계엄이 선포된 오후 5시를 전후하여 부산진경찰서와 동부산경찰서에서 발포하여 13명이 목숨을 잃었고, 마산 등지에서도 1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광주에서는 광주고생 및 전남대생과 시민들 수천 명이 데모를 벌이다가 밤 9시 25분경 경찰의 발포로 8명이 희생되었다.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인천 등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으나 경찰이 발포를 하지 않아 희생자는 생기지 않았다. ‘피의 화요일’이라고도 불린 4월 19일 시위는 부정선거 반대 규탄으로부터 시작된 4월혁명이 반독재투쟁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60년 4월 19일 이후 정국은 이승만의 자유당 총재직 사퇴와 이기붕의 공직 사퇴, 계엄사령부의 민심수습 노력 등으로 인해 그런 대로 어떤 해결점에 접근하는 듯 보였다.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퇴진시키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함으로써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체제만은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다. 격앙되었던 분위기도 표면적으로는 가라앉아 가는 듯 했다. 하지만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위에 나서면서 정국이 급변했다.

4월 25일 오후 5시 50분, 258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로 나섰다. 교수들은 시국선언문에서 학생데모를 불의에 항거한 민족정기의 발로로 규정했고, 대통령·국회의원·대법관 사퇴를 촉구했으며, 정부통령 선거 재실시, 부정선거 원흉 처단을 요구했다. 도서관과 연구실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 둘 달려 나와 스승들의 행렬 뒤를 말없이 따랐다. 질서정연한 시위 행렬이 종로 4가를 지날 무렵, 뒤따르는 학생과 시민들은 7~8천명을 넘어섰고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는 1만 명을 헤아렸으나 계엄군이나 경찰의 제지는 없었다.

이날 계엄군은 강력한 투쟁 동력 앞에서 무기력했다. 시위 대열이 기세를 올리며 이기붕의 집으로 쳐들어가려 하자 집안으로부터 총격이 가해져 몇 명이 다시 희생되었다. 다른 대열은 정치깡패 임화수의 집과 임화수 소유의 평화극장, 이정재의 집 등을 파괴하였다. 밤 9시 구속학생 전원이 석방되었다.

이튿날인 26일 통금이 해제된 새벽 5시부터 다시 시위가 시작되었고, 26일 오후 2시부터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는 이 대통령의 즉시 하야, 3·15 정부통령선거의 무효와 재선거 실시, 과도내각 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 단행, 개헌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 실시를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27일 이승만이 퇴진하는 것으로 제1공화국은 11년 8개월 12일 만에 막을 내렸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4.19를 일컬어 “혁명이되 아주 특이한 혁명. 위로부터의 혁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래로부터의 혁명도 아닌, 바로 그 때문에 4·19는 가까스로 해를 넘기자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도적맞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해는 대중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학생 등 지식인들이 주도한 4·19혁명을 ‘옆으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von Seiten)’이라 일컫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학생들이 앞장섰으며, 언론과 지식인들이 엄호와 지원의 대열에 나섰던 4·19를 학·언의 연계(nexus)가 이루어낸 혁명이었다고도 평가한다.

아무튼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데 방점을 둔다면 성공한 혁명이겠지만, 혁명 이후 구체적인 민중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각종 제도의 정착 등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명백히 실패한 혁명이었다. 그것은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할 토양이 되었고, 무엇보다 당시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정권담당자의 교체 이상은 허용할 수 없는 혁명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붉은 원숭이보다도 못한 본성을 확인하며 일상에 파묻혀 사는 동안에도 소수의 깨어 있는 이들은 있었다. 그들은 4월혁명 이후 반세기 우리 역사의 고비마다에서 끝내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이기에 굴종하지 않으면서 4월혁명이 해결하지 못한 미완의 과제를 민주화운동으로 풀어갔다.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글·어수갑 eohsgkdemo.or.kr


지상에 많은 혁명들이 있었다. 꿈꾸었던 세상은 이루어졌던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4월혁명 50주년을 맞아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질문이다. 그것을 인간의 본성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무소유를 설파하며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살다 간 법정스님은 인간에게 내재한 소유욕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다. 따지고 보면 혁명은 권력을 담당한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에 제동을 걸어 사회구성원들에게 고루 권리를 배분하고자하는 시도였다면, 혁명의 실패 또한 탐욕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권의 실패에서 이미 그것을 경험했다.

한편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 스탠리 밀그램이란 심리학자가 1962년 예일대학에서 행한 이른바 ‘복종실험’이란 게 있다.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일정한 조건 속에서 보이는 불법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통해 밀그램은 “이 실험에 참가한 1천명의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알게 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만일 나치 독일의 포로수용소를 미국에 세운다면 미국의 어느 동네에 가도, 그 동네가 너무 작은 동네가 아니라면 그러한 수용소를 위해 일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권위를 가진 자가 내리는 명령이 잔인하든 부당하든 그 명령을 너무나 기꺼이 따르는 듯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어떤 면에서 원숭이보다 인간이 이웃에 대해 냉혹하다는 실험 결과다.『위험한 호기심』이란 책에 의하면 시카고의 한 연구팀이 우리에 붉은 원숭이들을 가두고 먹이를 원하면 사슬을 잡아당기도록 했다. 하지만 함정이 있었다. 사슬을 잡아당기면 이웃한 우리에 갇힌 원숭이에게 고주파의 전기충격이 가해졌다. 이웃의 고통을 목격하자 대다수 원숭이들은 사슬을 다시는 잡아당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다른 원숭이에게 고통을 가하는 대신 12일 동안이나 굶었다. 물론 인간들은 그렇지 않았다. 다시 말해 원숭이들은 대부분의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위의 실험결과가 말해 주는 것은 인간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끝없이 잔인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간본성에 대한 우울한 결론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롭거나 선하기는커녕, 강자독식과 생존의 처절한 고통으로 넘실대는 가없는 바다임을 말해 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간에 내재해 있는 이기적 본성만이 전부라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팍팍할 것인가. 이웃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동참하고 불의에 저항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이들이 존재하기에 우리의 삶과 우리가 일궈내는 역사가 좀 더 가치 있는 것이 되는 게 아닐까. 비록 부당한 권위에 저항한다는 것이 밀그램의 실험이 보여주듯이 평범한 우리에게는 실로 몹시 어려운 일이겠지만 말이다.

4월혁명을 통해 우리는 불의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전제주의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자부”하며 “깜깜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4·19 서울대 선언문 중)들을 만나게 된다. “일부 몰지각한 자의 선동과 사주에 망동하여 소요행위를 자행”(서울지구 계엄사령관 포고문 제1호 및 2호 중)하는 ‘이적행위자’라는 이승만 정권의 겁박에 대해 그들은 “데모가 이적(利敵)이냐, 폭정이 이적이냐”라는 플래카드와 구호로 결연히 맞섰다.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같이 1948년 정부수립 이래로 이승만 정부는 친미와 반공만을 앞세운 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제왕적 통치를 일삼았다. 반민족 친일행위에 대한 단죄를 목적으로 1948년 10월에 발족한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고,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부패특권 세력에 부를 편중시킨 독재 정권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종신집권을 꾀한 ‘사사오입개헌’을 자행하고 정적제거를 위해 ‘진보당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 처형 및 언론자유를 정면에서 말살한 경향신문 폐간 등 끝없는 반민주주의적 폭거를 자행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 1960년에 일어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와 규탄에서 시작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4·19혁명은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에서부터 시작하여 3월 8일 대전에서의 학생 시위와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 당일의 3·15 제1차 마산시위, 그리고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4월 11일의 제2차 마산시위, 4·18 고려대생 시위에 이어 절정에 이른 4월 19일의 대규모시위와 4·25 대학교수단 시위 등으로 숨가쁘게 전개되었다.

시위 숫자나 사상자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낸 『민주화운동사 연표』를 참조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 4월 19일 아침 신문을 펼쳐 본 학생과 시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1면 머리기사로 4월 18일의 고려대생 시위에 대한 상보가 실려 있고, 깡패들의 시위대 습격 전말이 사회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전 8시 30분쯤 선언문과 격문을 보던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대광고교생 1천 여 명이 경찰의 바리케이트를 넘어뜨리고 함성을 지르자 9시 20분경 교문을 나서 부근에 있는 법대생, 미대생들과 합세했다. 10시 30분경 3천여 명의 서울대생들이 현재의 서울특별시의회인 국회의사당 앞에 모였고, 뒤이어 서울대 사대와 상대, 건국대생들이 달려왔다.

동성고 학생들과 고려대생도 나왔다. 동국대생 2천 명이 11시경 쏟아져 나온 것을 비롯해 연세대, 중앙대 등 여러 대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의대생들은 흰 가운을 입고 나왔다. 중·고생들도 속속 참여했다. 11시 50분경 동국대생들이 중앙청과 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현 청와대)쪽으로 향하면서 시위 양상은 바뀌었다. 다른 대학 학생들과 동성고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때부터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나왔다. 실업자,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도 시위대에 합세했다. 오후 1시 40분경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일제히 발사해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다. 2시 50분경에는 중앙청 부근 무기고에서 경찰의 무차별 발사로 8명이 숨졌다. 시위대가 이기붕 국회의장 집으로 몰려들기 직전 이기붕은 6군단사령부로 피신했다. 2시 반경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늘어나 서울 시내 주요 거리는 시위대 물결로 뒤덮였다. 5시 이후에도 광화문에서 세종로, 서울시청 일대에서 경찰과 시위대 간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에 불이 치솟는 등 건물 26개소가 파괴되었다. 이날 시위로 서울에서 104명이 사망했다.
이승만 정부는 2시 40분경 서울 일원에 경비계엄을 1시로 소급해 선포했다. 4시 반에는 부산·대구·광주·대전에도 경비계엄이 선포되었고, 5시에는 서울 등 5개 도시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에도 곳곳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 4월 19일의 시위는 거의 전국적인 규모였다. 부산에서는 경남공고, 데레사여고, 부산상고 등 고교생의 데모가 일어나 시민들과 합세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는데, 계엄이 선포된 오후 5시를 전후하여 부산진경찰서와 동부산경찰서에서 발포하여 13명이 목숨을 잃었고, 마산 등지에서도 1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광주에서는 광주고생 및 전남대생과 시민들 수천 명이 데모를 벌이다가 밤 9시 25분경 경찰의 발포로 8명이 희생되었다.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인천 등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으나 경찰이 발포를 하지 않아 희생자는 생기지 않았다. ‘피의 화요일’이라고도 불린 4월 19일 시위는 부정선거 반대 규탄으로부터 시작된 4월혁명이 반독재투쟁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60년 4월 19일 이후 정국은 이승만의 자유당 총재직 사퇴와 이기붕의 공직 사퇴, 계엄사령부의 민심수습 노력 등으로 인해 그런 대로 어떤 해결점에 접근하는 듯 보였다.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퇴진시키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함으로써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체제만은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다. 격앙되었던 분위기도 표면적으로는 가라앉아 가는 듯 했다. 하지만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위에 나서면서 정국이 급변했다.

4월 25일 오후 5시 50분, 258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로 나섰다. 교수들은 시국선언문에서 학생데모를 불의에 항거한 민족정기의 발로로 규정했고, 대통령·국회의원·대법관 사퇴를 촉구했으며, 정부통령 선거 재실시, 부정선거 원흉 처단을 요구했다. 도서관과 연구실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 둘 달려 나와 스승들의 행렬 뒤를 말없이 따랐다. 질서정연한 시위 행렬이 종로 4가를 지날 무렵, 뒤따르는 학생과 시민들은 7~8천명을 넘어섰고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는 1만 명을 헤아렸으나 계엄군이나 경찰의 제지는 없었다.

이날 계엄군은 강력한 투쟁 동력 앞에서 무기력했다. 시위 대열이 기세를 올리며 이기붕의 집으로 쳐들어가려 하자 집안으로부터 총격이 가해져 몇 명이 다시 희생되었다. 다른 대열은 정치깡패 임화수의 집과 임화수 소유의 평화극장, 이정재의 집 등을 파괴하였다. 밤 9시 구속학생 전원이 석방되었다.

이튿날인 26일 통금이 해제된 새벽 5시부터 다시 시위가 시작되었고, 26일 오후 2시부터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는 이 대통령의 즉시 하야, 3·15 정부통령선거의 무효와 재선거 실시, 과도내각 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 단행, 개헌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 실시를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27일 이승만이 퇴진하는 것으로 제1공화국은 11년 8개월 12일 만에 막을 내렸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4.19를 일컬어 “혁명이되 아주 특이한 혁명. 위로부터의 혁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래로부터의 혁명도 아닌, 바로 그 때문에 4·19는 가까스로 해를 넘기자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도적맞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해는 대중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학생 등 지식인들이 주도한 4·19혁명을 ‘옆으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von Seiten)’이라 일컫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학생들이 앞장섰으며, 언론과 지식인들이 엄호와 지원의 대열에 나섰던 4·19를 학·언의 연계(nexus)가 이루어낸 혁명이었다고도 평가한다.

아무튼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데 방점을 둔다면 성공한 혁명이겠지만, 혁명 이후 구체적인 민중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각종 제도의 정착 등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명백히 실패한 혁명이었다. 그것은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할 토양이 되었고, 무엇보다 당시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정권담당자의 교체 이상은 허용할 수 없는 혁명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붉은 원숭이보다도 못한 본성을 확인하며 일상에 파묻혀 사는 동안에도 소수의 깨어 있는 이들은 있었다. 그들은 4월혁명 이후 반세기 우리 역사의 고비마다에서 끝내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이기에 굴종하지 않으면서 4월혁명이 해결하지 못한 미완의 과제를 민주화운동으로 풀어갔다.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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