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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사료(구술) 이야기

부활하라, 마산의 혼이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4. 12. 13:26

부활하라, 마산의 혼이

 

글·어수갑 eohsgkdemo.or.kr

 

곧 4월혁명 50주년을 맞는다. 4월혁명에 면면히 흘렀던 정신은 민주주의이며, 그것을 추동한 힘의 원천은 국민들의 저항권(Widerstandsrecht)이다. 저항권은 우리의 현행 헌법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명시 여부와 상관없이 일종의 천부인권적인 자연법으로 보는 것이 대다수 학자들의 입장이다. 이를 법으로 명시한 대표적인 예는 독일의 기본법 제 20조 4항이다.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의 훼손을 시도하려는 자에 대해 다른 시정방법이 불가능한 경우에 모든 독일인들은 이에 저항할 권리를 갖는다”라는 규정이 그것이다. 우리의 경우 지난 날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정권에 저항하여 투쟁했던 빛나는 역사를 갖고 있는데, 이런 저항권의 대표적인 표현이 4월혁명과 광주항쟁, 그리고 6월항쟁이다.
그런데 ‘저항’이란 단어를 삐딱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우리 현대사를 빛낸 수 십 년의 민주화 투쟁 시기를 지워버리고 싶은 집단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저항권의 행사는 종종 구체제(앙시앵레짐)의 종언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저항권은 헌법상의 기본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개념이므로 혁명(또는 혁명권)과는 다르고,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보수세력이라면 결코 경계하거나 거부할 개념은 아닌 것이다. 하긴, 수구는 창궐하되 보수는 찾기 힘든 우리 사회의 현실을 참작한다면 저항권에 저항하고 싶은 이들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4·19처럼 저항권의 발로가 정권을 바꾸기도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저항권은 기본적으로는 정권이 국민들의 제반 권리를 지켜주지 못할 경우 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최후의 국민적 권리이자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화운동과 저항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에 놓인다.

인간의 본질을 호모 레지스텐스, 곧 저항하는 존재로 사유하는 이들도 많다. 사르트르와 까뮈, 함석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에 의하면 사람은 저항하는 존재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불의와 불공평과 부조리와 자유 아닌 구속에 대한 저항. 생각하는 존재(res cogitans)인 인간은 저항할 수 있기에 비로소 인간인 것이라고.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4대 정부통령 선거는 지방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곳곳에서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 민주당 참관인 축출 등 많은 부정이 저질러졌다. 민주당은 투표가 진행 중인 4시 30분에 3·15정부통령선거가 전적으로 불법·무효라고 선언했다. 선거 결과 이승만 후보가 유효투표의 88.7%에 해당하는 9,633,376표, 이기붕 후보가 유효투표의 79%에 해당하는 8,337,059표, 장면 후보가 1,843,758표를 얻었다고 발표되었다.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장 후보가 이 후보보다 20여만 표가 더 많았고, 그 뒤 자유당에 대한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기붕이 장면보다 4배 이상을 득표했다는 것은 이 선거가 얼마나 극심한 부정선거였는가를 누구나 알 수 있게 했다.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유권자들이 중압감에 눌려 있었는데, 항구도시 마산에서 격렬한 시위와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등 갖가지 부정투표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마산시당 상급당인 경남도당은 오후 1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마산에서 민주당원이 중심이 된 시위에 시민·학생들이 합세해 오후 7시 30분경에는 시위군중이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때부터 경찰이 총을 쏘았고, 흥분한 군중들은 여당계 신문사인 서울신문사, 자유당선거대책위원회 등이 입주한 건물과 파출소 등을 파괴했다. 이날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했다(제1차 마산시위).

그 후 여러 지역에서 데모가 있었지만, 제2차 마산시위가 없었다면 3·15선거 결과가 기정사실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경찰이 마산시위 배후에 공산당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려는 것에 분노한 마산의 학생·시민들은 실종된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4월 11일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일제히 궐기했다. 이날 오후 6시경에는 시위자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이 시위에는 수많은 어머니들이 가담해 “죽은 내 자식을 내놓아라”라고 소리 질렀다. 밤에 다시 경찰 총격으로 2명이 사망했다. 시위는 12, 13일에도 계속되었다. 이 대통령은 13일과 15일에 잇달아 특별담화를 발표해 마산폭동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를 씌우며 위협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상이 4월혁명의 전야에 해당하는 1, 2차 마산시위의 경과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4월혁명 50주년을 맞는 올해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4월혁명 총집 발간사업이 있다. 거기엔 4월혁명 당시 국내외에서 생산된 주요 사료가 망라될 예정이며, 주요 관련 사료에 대한 해제와 더불어 1959년 12월 이승만 정권이 부정선거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획책하던 시점부터 1960년 4월혁명 직후 이승만의 하야시기까지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일지가 포함된다.

이를 위해 당시 주요언론인 동아일보(야당 성향), 조선일보(중립 성향)와 서울신문(여당 성향) 등의 중앙지와 5대 주요 지방도시의 대표적인 신문들을 비롯하여 당시 출판된 『4월혁명;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현역 일선 기자 동인 편), 『마산사건 국회속기록』, 『4월혁명투쟁사; 취재기자들이 본 4월혁명의 저류』(조화영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이강현 편), 『기적과 환상』(안동일, 홍기범 공저), 『4월혁명 승리의 기록』(마산일보사 편), 『마산의 혼』(지헌모 편) 등과 해외 주요 언론의 기사가 활용될 예정이다. 그 외에도 연세대 기록보존소와의 협약에 의해 기념사업회 사료관에서 복제처리하여 4월혁명 총집발간을 위해 소장하고 있는 상당량의 4·19관련 사료와 3·15의거기념사업회의 기증사료도 포함되어 있다.

『마산의 혼』에는 김주열이 어머니에게 보낸 3월 10일자 편지가 수록되어있다. 그 내용의 진위에 대해 경남대 이은진 교수는“편저자가 아무런 인용 문귀가 없어서 쓰여진 것을 그대로 사실로 인정한다”고 밝힌바 있는데,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뵈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요.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십시오.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해서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저는 이 데모에서 분노와 슬픔에서, 자유를 외치다 죽은 후 이 나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저승에서 천년이나, 만년이나, 두고두고 울어주는 종이 되겠습니다.
3월 10일 불효 주열 올림”

김주열이 이 편지를 실제로 썼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떠나서 유서와도 같은 이 편지는 4월혁명에 참여한 대다수 시민학생들 사이에 유유히 흐르던 일종의 시대정신(Zeitgeist)이자 ‘마산의 혼’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마산의 혼은 4월혁명의 봉화가 되어 전국에서 타올랐다. 그리고 그 후 4월혁명을 짓밟고 들어선 군사독재의 심장을 겨눈 것도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부마항쟁이었으니, 마산시민들의 자유로운 영혼, 저항하는 영혼은 역사에 길이 새겨져 마땅하다. 4월혁명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도저한 절망이 아우성친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깊다. 동토를 뚫고 마산의 혼이 다시금 생명의 봄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한다.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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