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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 시각으로 작품 만들고 싶어” 공연예술가 김민정 본문

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사회적 약자 시각으로 작품 만들고 싶어” 공연예술가 김민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7. 2. 10:47
이 땅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예술가로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워낙 토양이 척박한데다 대중들의 공감을 얻기도 쉽지 않다. 장르가 무용이라면 더욱 그렇다.
공연연출가 김민정(36) 씨는 꼿꼿하게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보기 드문 예술가로 꼽힌다. 나이답지 않게 다양한 안무 경력을 자랑하는 그는, 현대무용 전공자답게 무용, 연극, 음악 등을 결합한 실험적인 다원예술 작품을 선보여 왔다. 독립예술제, 인디페스티벌, 프린지페스티벌, 다원예술제 등의 무대에 서며 그의 진가를 알려왔다. 1991년 <신세계>를 시작으로 <12월 12일>, <오만과 편견> 등 수십 편을 만들었다.
프로활동 10년 남짓, 그는 벌써 무용계 스타로 자리 잡았다. 그녀의 춤은 기존 무용과는 다른 탈장르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극과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퍼포먼스를 만드는 그는, 실험예술의 대표주자로 인정받는 젊은 연출가다. 그리고 그는 무겁고 난해하고 엄숙주의에 빠져 있던 기존의 예술관을 향해 돌을 던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평가에 대해 “기존의 형식을 깨는 무용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과분한 찬사”라고 겸손해 했다.
“물론 쉽지는 않죠. 실험적인 무용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무용 분야가 워낙 보수적인데, 창작 열망이 많아 가리지 않고 참가했죠. 제 나름대로 행복했고, 그만큼 에너지가 충만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변방 독립실험예술계의 여왕
그는 어릴 적부터 연기자가 꿈이었다. 연극과 뮤지컬 등 무대에 서는 배우. 그가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결합한 실험적인 무대를 선보일 수 있었던 데는 어릴 때부터 ‘연기’에 대한 꿈을 키웠던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무용과를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릴 때부터 연기가 하고 싶었어요. 고교 시절 연극반 활동을 했고, 뮤지컬 배우가 되고자 무용과에 진학한 거죠. 춤은 무용과를 나오지 않으면 못할 것 같았어요.”
그는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에도 국공립 또는 사립 무용단에 입단하지 않았다. 또한 교육자의 길도 가지 않았다. “내 꿈을 찾겠다.”고 맘먹은 그는 대신 1996년 연극집단 뮈토스에 들어갔다. 10년 넘게 이곳에서 배우, 무대 연출가로 맹활약하고 있다.
연극판은 원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곳이다. “활동의 영역이 넓은 반면 경제적으로는 힘들 텐데…….” 그에게 물었다. 그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렵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힘들어도 견뎌낼 수 있다.”며 웃었다.
 
그렇지만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게 안타까울 때가 있다.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문화예술위원회나 문화재단으로부터 기금을 받지 않으면 힘든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번 돈을 다시 공연을 하는 데 쏟아 붓기에 바빴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상업적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놀이공원 안무가 제안도 받았었지만 거절했다.”며 “돈이 되든, 그렇지 않든 내 작품을 만드는 동안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8년부터는 그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도 한층 넓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독립예술제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로 11회를 맞은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의 전신이다.
“문화예술의 진보를 꾀하는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한마디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어요. 저로서는 활동 공간이 넓어진 것인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는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함께 댄스 프로젝트그룹 ‘무브먼트 당당’을 만들었다. 공연이 있을 때에만 함께 작업하는 동인제 형태다. 지금까지 그는 ‘당당’을 통해 <독립만세> <동상이몽> <춤추는 언니들> 등 영화, 마임, 음악, 페인팅 등 여러 장르의 예술작품과 연계한 실험작을 선보였다. 그를 ‘변방 독립실험예술계의 여왕’으로 불리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작품에

그의 작품에는 여타 예술작품들과는 차별된 그 무언가가 있다. 바로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한국사회가 보이고, 우리나라의 역사가 보인다. 성적소수자, 농민, 빈민, 민주화 희생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떠오른다.
91학번인 그는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강경대 사망사건’을 접했다. 당시 수많은 대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수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경대, 김귀정 열사는 제게 큰 충격이었어요. 무섭긴 했지만, 집회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게 된 계기였어요.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하고 싶다’고 그때부터 마음먹은 것 같아요.”
당시 그의 활동은 단순히 집회와 시위에 참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무용을 토대로 한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구체화시켜나갔다. 예술학부 노래패 ‘민사랑’ 활동이 그 시작이다. 그리고 전공을 살려, 춤패를 만들었다. 1994년 쌀 수입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우루과이라운드>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예술대 문화부장, 총학생회 문화부 집행부원으로도 활동했다.
“자연스럽게 제 작품 속에는 사회적인 의식이 녹아들었어요. 동성애, 가족, 사랑과 연애, 서민, 군대위안부,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 그 이유는 주제는 무겁지만 형식은 밝고 경쾌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공연 내내 관객을 끊임없이 웃긴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는 한번쯤 생각에 잠기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진지한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춤의 대중성을 추구한다. “무대에 선 배우들과 관객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플레이댄스’가 진정한 춤이 아닐까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를 모티브로 한 <떠나는 사람들>, 6·10항쟁 기념공연인 <가열차게! 달려>, 군대위안부·4·19민주혁명·5·18민주항쟁의 이미지를 차용한 <증거, 혹시 인멸된……>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하는 행사에 단골로 출연하는 이유도 “민주화운동으로 희생한 이들을 추모하고 싶다.”는 신념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계급이나 이념을 떠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작품을 만들고 싶다.”며 “강자만 배려하고, 약자를 외면하는 현 사회를 보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고 말했다.
“강경대, 김귀정 열사는 제게 큰 충격이었어요. 무섭긴 했지만, 집회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게 된 계기였어요.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하고 싶다’고 그때부터 마음먹은 것 같아요.”
당시 그의 활동은 단순히 집회와 시위에 참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무용을 토대로 한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구체화시켜나갔다. 예술학부 노래패 ‘민사랑’ 활동이 그 시작이다. 그리고 전공을 살려, 춤패를 만들었다. 1994년 쌀 수입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우루과이라운드>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예술대 문화부장, 총학생회 문화부 집행부원으로도 활동했다.

 

“자연스럽게 제 작품 속에는 사회적인 의식이 녹아들었어요. 동성애, 가족, 사랑과 연애, 서민, 군대위안부,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 그 이유는 주제는 무겁지만 형식은 밝고 경쾌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공연 내내 관객을 끊임없이 웃긴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는 한번쯤 생각에 잠기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진지한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춤의 대중성을 추구한다. “무대에 선 배우들과 관객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플레이댄스’가 진정한 춤이 아닐까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를 모티브로 한 <떠나는 사람들>, 6·10항쟁 기념공연인 <가열차게! 달려>, 군대위안부·4·19민주혁명·5·18민주항쟁의 이미지를 차용한 <증거, 혹시 인멸된……>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하는 행사에 단골로 출연하는 이유도 “민주화운동으로 희생한 이들을 추모하고 싶다.”는 신념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계급이나 이념을 떠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작품을 만들고 싶다.”며 “강자만 배려하고, 약자를 외면하는 현 사회를 보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고 말했다.

 
 
무대 위에서 더 많은 관객과 진실한 소통을

사회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됐다. 그가 최근 들어 우리나라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주로 선보이는 까닭이다. <천추의 한>, <몽유록> 등의 작품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지난해 선보인 <천추의 한>은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를 소재로 비보잉과 결합한 퍼포먼스이고, 지난해와 올해 선보인 <꿈속을 거닐다-몽유록>은 조선시대 중엽 유행한 형식을 차용해 잼 퍼포먼스 형태로 구성한 것이다.
앞서 2000년 첫 선을 보인 <불후의 명작> 역시 ‘한국현대사 100년의 시간여행’이 타이틀이다. “‘19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100년 동안, 현재의 모습을 가져오게 한 과거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이에요. 그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면을 뽑아 퍼포먼스로 만든 거죠.”
지난해 4월 그는, 활동하면서 만난 사진가와 결혼을 했다. 지금 그는 늦은 나이에 결혼한 만큼 2세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내년쯤에는…….” 아이를 갖는다고 해서 그가 지금껏 해온 활동을 접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단지 잠시 휴식기를 갖는 것뿐이다.
“좀 더 많은 관객을 만나 무대 위에서 진실한 소통을 하는 게 앞으로의 계획이자 희망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쉼 없이 노력을 해야죠.”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경기도 일산행 버스에 올랐다. 무용과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이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면 거의 자정 무렵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그룹 ‘당당’의 이름처럼, 서른여섯 살 무용수 김민정. 그는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글·김미영 | <한겨레신문>기자
사진·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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