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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관/역사기념관_국내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을 품은 보수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3. 12. 11:42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을 품은 보수산

- 부산민주공원과 민주항쟁기념관 -

정호기 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부마민주항쟁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사에서 박정희 정권 집권기의 마지막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1979년 10월 16~17일 부산에서, 그리고 18~19일 마산에서 전개되었던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에 직접적 인과성을 갖지는 않지만 당시 시민들이 가장 많이 외쳤던 ‘유신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유신정권의 폭압을 규탄하는 항거였고, 10·26사건이 발발하게 된 하나의 계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의의완 국가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마민주항쟁’ 또는 ‘부마 항쟁’ 보다 ‘부마사태’라는 명칭이 여전히 더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국가나 지배집단이 권위주의적 통치를 부정 혹은 방어하기 위해 민중들의 항거에 흔히 덧칠하는 ‘사태’ 또는 ‘소요’라는 용어를 사실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이 발발한지 7개월 후에 일어난 광주민중항쟁도 처음에는 사태로 불리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민주화운동들도 처음에는 대부분 사태로 불러졌다. ‘사태’에서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으로의 변화는 그 사건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자 기억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광주민중항쟁과 부마민주화운동은 사뭇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 두 사건이 연계되어 있고, 인접한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사건이 전개되었던 방식과 그 결과 그리고 기억의정치가 이루어졌던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부마민주항쟁에서 부산의 민주화운동의 기념으로

  그 동안 부마민주항쟁의 기념사업이 진행된 과정과 결과를 보면 부산에서의 항쟁이 부각된 반면, 마산에서의 항쟁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어쨌든 1989년 이후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기념을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기억투쟁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 단초는 제1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창립된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하기념사업회)였다. 기념사업회는 창립총회에서 장기사업으로 민주공원, 기념관 및 기념탑 조성 등을 계획했는데, 바로 이것이 부산민주공원의 모태였다.
  그러나 기념사업이 실제 본격화된 것은 1994년이었고, 이를 위해 4월에 기념사업회가 사단법인으로 전환되었다. 기념사업은 처음에는 기념탑건립으로 시작되었다가 기념관 건립으로 발전했고, 1995년 8월에 부산민주공원의 조성으로 확정되었다. 소요 예산은 국민 및 시민들의 모금으로 충당할 계획이어서, 1995년 12월에 부산지역 언론사들과 구체적으로 논의까지 이루어졌다. 이 계획은 이듬해인 1996년 1월 기부금품모집금지법이 제정됨에 따라 성삳되지 못했으나, 기념사업회 이사장과 김영삼 대통령의 면담을 통해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상황이 급진전 되자 1996년 3월에 부산시와 기념사업회는 간담회를 갖고, 부산민주공원을 공동추진하기로 협의하였으며, ‘민주공원조성범시민추진위원회’를 창립하게 된다.
  

상징조형물 - 민주의 횃불


실내 전시장

부산민주공원 내 장승터



이 과정에서 부마민주항쟁의 기념사업은 부산의 민주화운동을 총괄하는 기념사업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당시 부산시민들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과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986년의 한 조사의 의하면, 부산시민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사건은 4월혁명이었고, 이어서 6월민주항쟁, 그리고 부마민주항쟁이었다. 일단 4월혁명은 교과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학교를 통해 교육되고 있었으므로 그렇다고 할지라도, 6월민주항쟁에 대한 인지도가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인지도를 근소하지만 앞선 것은 눈에 띄는 것이었다. 이는 세 가지 이유에 기인했다. 첫째, 6월민주항쟁이 보다 최근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둘째, 부산의 부마민주항쟁이 이틀 동안 전개되었던 것에 비해 6월민주항쟁은 근 20여일 이상을, 부산 출신인 박종철의 사망(1월 14일) 이후 전개된 추모집회까지 확장하면 수개월동안 부산시민들의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월민주항쟁에 비해 부마민주항쟁의 부정적 의미와 평가에 대한 기억이 아직 잔존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산민주공원의 장소성과 공간 개념

  부산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민주화운동 기념사업은 1962년 4월 용두산 고우너에 세워진 ‘4월민주혁명희생자위령탑’ 이었다. 두 번째가 1988년 10월 현 중앙도서관 앞에 세워진 ‘10·16부마민중항쟁탑’ 이다.
  부산대총학생회가 건립을 추진한 이 조형물은 새겨진 ‘독재 타도’라는 문구 등이 과격하다는 이유로 제작이 지연되기도 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1997년 10월에 착공하여 1999년 10월에 완공된 부산민주공원이다. 부산민주공원은 민주화운동이 기념공원의 형태로 조성된 첫 사례이다. 일반적으로 민주화운동의 기념이 위령비나 추모비 긔고 기념모지의 형태로 등장했던 것에 비해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기념공원의 형태를 띤 것이 특징인데, 이는 부산지역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 가운데 4월혁명에서만 집단적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민주공원의 조성사업이 시작되면서 ‘어디에 공원을 조성할 것인가’ 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기념사업회는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과 상징성, 그리고 접근의 용이성을, 부산 시는 장소 확보의 용이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후자의 입장으로 정리되었고, 그것이 바로 현재의 장소인 중앙고원의 일부이다. 그런데 중앙고원은 1970년 보수산을 포함한 주변 일원이 공원으로 지정되었던 관계로 충혼탑, 해전승전기념탑, 조각공원 등 다양한 기념물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는, 나름대로 이미 많은 상징성이 구현되어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부산민주공원의 조성은 기존의 다양한 상징성이 배태되어 있는 곳에 ‘민주’라는 새로운 상징성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특히 부산민주공원의 맞은편 산 능선에 위치한 70m의 충혼탑은 매우 가시적이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사람들에게 위압감과 권위성을 충분히 느끼게 했다. 그래서 부산민주공원은 이러한 이미지와는 대비적으로 자연스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장소의 경관성, 풍수지리학 및 일제 하 항일운동의 역사에서 장소성을 찾았다.
  부산민주공원에 구현된 전체적인 공간개념은 ‘기념의 장’, ‘교육학습의 장’, 그리고 ‘광명의 장’ 이었다. 부산민주공원은 개획 당시에는 민주항쟁기념관이 위치한 보수산 정상을 정점으로 총 5개 공간의 개념적 흐름을 설정하고 있다. 인식의 장(봉건군주/해방전) -> 고난의장(해방후·군부독재시대 초기) -> 추념의 장(군부독재시대 말기) -> 정의의 장(문민정부/지방자치시대) -> 염원의 장이라는 흐름을 순차적으로 배치하였는데, 불과 5년이 조금 지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다소 인위적이고 직선론적 역사발전관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의의 장은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현재로서는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많다.
  기념사업이 진행되면서 부산민주공원 전반에 대한 공간개념은 다소 바뀌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공원 전체를 대상으로 공간개념을 설정했으나, 이후에는 기념관을 중심으로, 즉 가능한 기념관에 이 개념들을 담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명칭에 있어서도 고난의 장은 어렵살이 마당으로, 추념의 장은 넋 기림 마당으로, 정의의 장은 올바름 마당으로, 그리고 염원의 장은 바램 마당으로 각각 한글 식 표현으로 바꾸었다.
  민주항쟁기념관이 이 모든 공간개념을 포괄하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장들은 시대적 흐름을 상징하는 개념 설정만 되어 있고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이 많은데, 이는 후대의 몫과 역할을 남겨두기 위함이라고 한다.

고난의 장

 
  민주항쟁기념관의 구성
  부산민주공원의 핵심은 튼튼한 성곽 요새를 연상시키는 민주항쟁기념관이다. 기념관은 건물의 영구성과 굳건한 민주의 성을 쌓겠다는 상징적 의미로 내부는 철근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외장은 화강암으로 마감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면적 1,600평의 규모이며, 원형 램프로 둘러싸인 건물의 안쪽에 20m의 상징 조형물인 ‘민주의 햇불’ 이 들어서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념공간에서 상징조형물이 건물의 외부에 위치하는 것과 다른 형태이다.

주계단


  민주항쟁기념관은 일단 공사가 추진되고, 이후에 내부 공간의 구성과 활용방안을 고민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고민은 1998년 6월 25일에「부산민주공원 개관 준비를 위한 공청회」로 나타났다. 이 공청회에서는 기념관을 ‘복합문화센터’로 나타났다. 이 공청회에서는 기념관을 ‘복합문화센터’로 건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심광현 교슈가 제안한 이 개념은 ‘다충적이고 복합적인 주제를 중심 과제로 삼아 다양한 문화적 장르와 분야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문제를 풀어가는 새로운 문화공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이 완전하게 반영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설전시실만큼은 이 개념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된 상설전시실은 관람객의 동선 흐름을 따라 들어가는 길 -> 민주의 문 -> 화상의 숲 -> 부산의 함성 ①,② -> 확산의 망 -> 공공성의 파괴와 생성 -> 연대의 공간 ①,② -> 영상마당 -> 추모의 공간 -> 희망의 빛 -> 나가는 길로 배치되어 있다. 일단 이러한 공간 개념은 그 동안 흔하게 논의되었던 사건사 혹은 영웅사 중심의 공간구조를 탈피하고 있다. 물론 부산의 함성에서는 부산지역과 관련이 있는 여러 사건들을 정리하고 있으나, 다른 분활공간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매우 포괄적이고 다양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들이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한편 마산의 부마민주항쟁 기념사업은 2001년 1월에 세워진 ‘10·18부마항쟁 상징조형물’이 전부다. 그 위치를 두고 오랫동안 논의한 끝에 부마민주항쟁과는 무관한 해운동 청소년고원에 건립되었다. 이곳은 새로운 상징성을 창출한다는 점으로 보면 긍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힘겨운 상징투쟁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3·15성역공원의 부조벽과 기념물을 설계했던 진해 출신의 조각가 김동숙이 설계한 이 조형물은 ‘독재와 민주들의 고뇌와 의지를 어두움과 빛’ 으로 대비하여 표현하고 있다.

민주화운동 기념관 운영의 가능성
  부산민주공원과 민주항쟁기념관의 건립은 1990년대에 이루어진 민주화운동의 기념사업들 가운데 가장 힘겹게 성사되었다. 그리고 또 수많은 고비를 넘어 처음으로 민주화운동 기념관을 민간단체가 독립적으로 관리 및 운영하게 되었다. 현재 민주항쟁기념관에서는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들이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다. 덕분에 부산민주공원을 조성할 당시 염려했던 ‘접근성’ 도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그리고 올해 7월에는 비워두었던 추념의 장에 ‘민주의 이름’ 이라는 조형물이 건립될 예정이다.
  또한 9월에는 상설전시관을 새롭게 꾸밀 계획이어서, 처음으로 민주화운동 기념관의 전시시설이 리모델링될 것이다.
  부산민주공원에는 두 명의 정치인, 즉 ‘제14대 대통령 김영삼(1999. 10. 16)과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2000. 6. 9)’ 의 기념식수와 이를 나타내는 조그만 표지석이 있다. 반면에 국립5·18묘지에는 이 두 정치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문민정부 하에서 국립5·18묘지의 조성사업이 시작되어 완료되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끝내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민주화에 대한 서로 다른 잣대와 기준, 열망,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대한 다양한 복수의 기억이 현존한다는 사실만을 확인시켜 주는데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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