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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운동의 전환점 ‘5·18’과 기념관 없는 ‘5·18’ 기념사업 본문

민주화운동기념관/역사기념관_국내

한국 사회운동의 전환점 ‘5·18’과 기념관 없는 ‘5·18’ 기념사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3. 10. 09:58
한국 사회운동의 전환점
‘5·18’과 기념관 없는 ‘5·18’ 기념사업

-국립 5·18묘지,5·18기념공원,5·18자유공원, 그리고 전남도청 일대의 기념사업-
 

정호기(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광주민중항쟁(이하 ‘5·18’)은 1980년대 한국 사회운동의 출발점이며, 변혁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인식의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5·18’은 지방도시인 광주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도시라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이는 1980년 5월의 비극적사건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꾸준히 기억투쟁을 전개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5·18’에는 다른 민주화운동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치열한 기억투쟁인 ‘5월투쟁’ 혹은 ‘5월운동’이 있었다.
  5월운동은 국가를 상대로 하는 비체계적인 인정투쟁으로 시작해서, 점차 ‘5월 문제 해결을 위한 5 원칙’으로 정리되었다.
  이들 원칙 가운데 마지막 해결과제가 기념사업이었다. 5원칙은 형식적으로 달성된 측면이 많고 진상규명과 암매장지 발굴 등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성과를 거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기억투쟁의 방법과 효과에 영향을 받아 ‘5·18’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민주화운동들과 해방 이후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불행한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한국전쟁기에 발생한 양민학살사건들에 대한 기억투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보상심의위원회」가 결성된 특별법의 연원부터, 실제로 심의 및 사업이 이루어지는 과정까지 많은 결정사항들이 ‘5·18’의 영향력 하에 있다. 물론 ‘민주화운동기념묘지’ 조성사업과 ‘민주화운동 기념관’ 건립사업도 예외가 아니다.
 
  ‘5·18’ 기념사업의 공간 구조와 개념

  기념사업의 측면에서 보면, 저항적 기억투쟁의 일환으로 1985년에 기념사업을 진행하다가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받았으나, 이로부터 3년 후인 1988년에는 국가적 차원의 기념사업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다시 5년 후인 1993년에 김영삼 대통령의 ‘5·13특별담화’가 발표되면서 기념사업은 현실화 되어 갔다. 이처럼 기념사업이 실제 진행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5·18’의 해결을 위해서는 기념사업보다 선행되는 과제가 요구되었으며, 기념사업 그 자체도 치열한 기억투쟁의 중심에 놓여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91년 3월에 노태우 대통령이 상무대 부지 5만평의 무상양여를 발표하면서 ‘기념공원’과 ‘기념탑’ 건립의 문제가 부각되기는 했으나, ‘5·13 특별담화’를 계기로 망월묘역, 전남도청 그리고 상무대라는 세 공간을 축으로 하는 기념공간 조성으로 방향을 정립하였다.
기념공간의 세 축은 형성되었으나, 어떻게 조성할 것이며, 각 공간들에 채울 내용과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미흡했다. ‘5·18’ 기념관에 대한 고려나 관심도 없었다. 이것은 업적 중심의 ‘관 주도’ 기념사업이 빚어낸 결과였다. 결국 ‘5·18묘지’가 착공된 이후인 1995년에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물이 「5·18기념사업 종합계획」이다. 이 계획서에 의하면 5·18묘지는 ‘추모의 장’, 상무대 지역의 기념공간(특히 5·18기념공원)은 ‘발전의 장’, 그리고 아직 기념사업이 착수되지 않은 전남 도청 및 도청 앞 광장은 ‘역사인식의 장’으로 정립되었다.

  망월묘역과 국립5·18묘지

  ‘망월묘역’과 ‘국립5·18묘지(이하 5·18묘지)’는 둘 다 국가가 조성했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 망월묘역은 마지막까지 시민군들이 방어하던 전남도청을 계엄군이 점령한 날인 5월 27일 오전에 급박하게 만들어졌다. 계엄군은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과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던 희생자들을 광주시 시립공원묘지 3묘역의 1,000여 평에 일괄 매장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게 망월묘역의 조성은 ‘5·18’의 종결을 의미했으나, 망월묘역은 5월운동을 통해 ‘5·18’를 잉태해가고 있었다.
  5·18묘지는 진입공간, 체험공간, 기념공간, 참배공간, 그리고 묘역공간으로 세분되는데, 가장 핵심적인 공간은 참배공간이다. 참배공간에 5·18민중항쟁추모탑, 부조벽, 군상조형물과 참배단 등이 모두 집결되어 있다. 이외에도 5·18묘지에는 유영봉안소, 민주의 문, 역사의 문 ,숭모루, 연못 및 석교, 헌수기념비 등 다양한 기념시설물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전형적인 의례형기념묘지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새롭게 조성된 5·18묘지가 망월묘역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담아내고 있는지에 관해서 많은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딜레마였다. 국립모지를 지향하고, 국립묘지의 외형을 추구하여 조성한 ‘5·18묘지’에서 민중성과 저항성을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5·18묘지에는 다른 기념묘지들과 달리 기념관이 없다. 5·18묘지의 조성계획 초기부터 기념관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초기에는 5·18묘지에서든, 전남도청에서든 기념관 건립을 반대해 온 정부와 광주시의 의견이, 5·18기념사업 종합계획이 수립된 이후에는 전남도청을 이전한 후 이곳을 기념관으로 활용한다는 생각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전남도청의 이전을 반대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실제 이전이 늦어지면서 5·18묘지가 당시의 생생한 정황을 보여주지 못하는 정제된 공간이라는 비판이 제기됨에 따라 기념관을 대체할 시설이 요구되었다.

  그 대안이 ‘역사의 문’ 지하에 ‘전시홀’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본래 식당으로 계획된 이 공간은 효용성에 문제가 있어 비어 있었으나, 1998년부터 전시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120여 점의 사진자료들을 비롯하여 5·18묘지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태극기 및 신문자료와 검시보고서 등이 전시되어 있고, ‘5·18묘지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태극기 및 신문자료와 검시보고서 등이 전시되어 있고,’5·18‘ 당시를 촬영한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또 하나의 대안은 ’유물전시관‘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유물전시관 건립은 5·18묘지가 완공된 직후부터 제기되었다. 묘지 옆 옛 도로에 약 2,440평 규모로 건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유물전시관은 망월묘역이 조성되던 상황을 밀납으로 재현하고 묘지 내부를 공개하고 이장과정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들을 전시할 계획이지만, 예산상의 문제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유물전시관이 들어선다고 해서, 5·18묘지가 우리에게 주는 획일화되고 권위적인 이미지가 상쇄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근심에 찬 목소리가 많다. 
 
  5·18기념공원과 5·18자유공원

  5·18기념공원과 5·18자유공원이 조성된 상무대에는 ‘5·18’ 당시 계엄군 사령부가 주둔해 있었고, ‘5·18’과 관련하여 구속된 사람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그래서 상무대의 이전이 발표된 직후부터 관련단체들과 재야 및 시민단체들은 이곳에 5·18묘지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5·18묘지는 상무대 부지에 조성될 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망월묘역의 저항적 상징성이 도심공간으로 파고드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상무대에는 시민들에 대한 집단배상적 의미를 지닌 5·18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5·18기념공원의 볼거리는 거대한 집괴형 5·18현황조각 및 추모·승화공간과 5·18기념문화관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들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공원의 형태를 지향했다는 점을 감안할지라도, 5·18의 역사성과 다양한 사연들을 담아내지 못한 기념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5·18민주공원’은 제주4·3항쟁의 기념사업을 위해 2001년 4월에 발간된「제주 4·3평화공원 조성 기본계획」에서 부정적인 선례로 제시되기도 했다.

 
  ‘5·18기념문화관’은 3,210평의 연건축 면적에 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다. 이 건물의 지하 1층에는 ‘5·18전시실’과 ‘5·18자료실’이 있다. 자료실은 본래 이곳에 들어설 계획이 아니었으나, 전남도청의 이전이 지체되면서 이곳에 배치되었다. 따라서 자료실에 필요한 기능을 갖추지 못한 eco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시실 역시 기능이 고려되지 않은 공간이다. 일단 기념공간이 갖추어야 할 조명시설이 없으며, 전시물의 크기와 규모가 고려되지 않은 평범한 사무공간이다. ‘5·18기념문화관’은 건립되고 난지 1년이 지나서야 운영 및 활용 방안을 담은 「5·18기념문화관 활성화를 위한 결과보고서」를 발행했다. 건물의 건립과 운영 및 활용 방안이 역순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전 광주매일 기자였던 김선출은 「5월의 문화예술」에서 5·18기념문화관은 대·중·소규모의 회의실과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을 뿐. ‘문화관’이 갖추어야 할 내용 및 구성을 발견하기 어려운 건물이라고 평가하면서, ‘5·18’을 주제로 한 문화예술품이 상설 전시되고 ‘5·18’을 문화적으로 승화시킬 창작과 공연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한편 5·18자유공원은 ‘5·18’의 역사적 현장을 재현한 공간이다. 이곳은 ‘5·18’ 전후 과정에서 연행되어 온 시민들을 수감하고, 이들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던 상무대 영창, 법정, 헌병대 관련 시설물들과 행사 및 전시의 기능을 갖춘 ‘자유관’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이 시설들은 당시의 건물들을 주위의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재현한 것이지, 원래의 시설물은 아니다. 1995년에 발간된「5·18기념사업 종합계획」이 수립되기 전에 상무 신도심 개발계획이 수립되었고, 다양한 이유들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다.
 
  ‘자유관’은 중앙의 로비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강당이, 우측에는 ‘전시홀’에는 배치된 단층 건물이다. ‘전시홀’은 ‘5·18’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의의 등이 문자와 영상 그리고 판화와 만화 등을 이용하여 서사적 담론 체계로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역사성과 현장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5·18’ 당시에 사용되었던 계엄군의 장비들 혹은 동일한 종류의 진압 장비들, 당시에 발간되고 배포되었던 유인물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은 매우 협소한 공간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화려하고 정갈하며 세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5·18’이 우리에게 부여해왔던 역사적 상징성을 소화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더욱 근심을 갖게 하는 것은 5·18자유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감소하고, 그나마 ‘전시홀’을 찾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점이다. 2002년 비엔날레 때에는 5·18과 예술이 만나는 시도의 일환으로 5·18자유공원이 전시공간으로 활용되었는데, 이 기획은 자유공원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시도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지막 ‘5·18’ 기념사업, 기념관 건립에 희망을 ...

  ‘5·18’ 기념사업은 다른 어떤 기념사업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현재에도 중요한 선행사업으로 고찰되고 있다. 사실 ‘5·18’은 집단모지와 기념공원 그리고 사적지 보존사업 등 다양한 유형의 기념사업이 이루어졌으므로, 기념사업을 위한 성찰의 대상으로 손색이 없다. 성찰의 과정은 곧 ‘5·18’ 기념사업에 대한 비판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판들 가운데 많은 점들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으나, 기념사업을 추지할 당시의 정치·사회·문화·조직적 조건들에 의해 안타까움으로 남겨진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5·18’ 기념사업은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 종합계획에 의하면, 전남도청이 이전한 후에 이곳에 기념관을 비롯하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5·18기념사업이 될 기념관 건립은 “지금껏 제기된 수많은 비판들과 문제점들을 충분하게 고민하고 반영한 그리하여 후대까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소망을 충실하게 담아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글 정호기(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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