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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사회운동의 서막을 연 4월혁명과 기념공간 본문

민주화운동기념관/역사기념관_국내

한국전쟁 이후 사회운동의 서막을 연 4월혁명과 기념공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3. 6. 15:39

한국전쟁 이후 사회운동의 서막을 연 4월혁명과 기념공간
- 국립4·19묘지, 4·19혁명 기념관 그리고 기념도서관 -

 

정 호 기(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2003년은 4·19혁명이 일어난 지 43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의거’로 격하되었던 ‘4·19’가 ‘혁명’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이다.

  이러한 명칭의 변화가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 국가적 차원의 대우가 달라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를수록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4·19혁명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1960년 사건이 발발한 이후, 4월혁명에 대한 공식적 평가는 대체로 학생들을 주체로 설정하고, 이들의 도덕적 열정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문민정부 하에서도 약간의 뉘앙스 차이는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대학과 노동현장에서의 ‘4·19’는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추구도, 희생자에 대한 평화로운 애도와 추모의 시간도 아니었다. 오히려 ‘4·19’는 당시 쟁점이 되고 있던 사회운동을 위해 기억 속에서 새롭게 불러내어졌고, 최루탄과 돌멩이가 서로 뒤엉킨 집회와 시위 현장을 지켜내는 이념적 자산이었다. 4월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는 널리 알려진 평가와 같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국사회의 모순이라는 역사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의 ‘4·19’는 1960년의 ‘4·19’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4·19’는 해방 이후 점차 고착화되던 한국의 정치·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발본적 문제의식과 저항의 지점들로 다시 독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4월혁명은 극단적 파시즘체제는 아니지만 반공주의에 기초한 이승만 정권의 ‘국민총동원체제’에 대한 항거였고, 정치·사회적 변화를 꿈꾸었던 민중들의 항쟁으로 해석되었다.

  국립4·19묘지의 기원과 역사성

  4월혁명은 한국전쟁 이후 발생한 최초의 국가폭력에 의한 집합적 죽음이었다. 3·15의거 희생자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18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부상자도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던 만큼, 즉시 희생자들에 대한 기념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다. 지난 호에서 서술한 3·15의거에 이어 4·19혁명의 기념사업이 진행된 형태를 구분해 보면, 크게 세 가지 형태였다.

  첫 번째는 기념묘지 조성이었고, 두 번째는 상징조형물과 기념물 건립, 그리고 세 번째는 기념도서관 건립이었다. 상징조형물과 기념물 건립이 사건의 종료 직후부터 현실화되었던 반면, 기념묘지 조성과 기념도서관 건립은 5·16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실현되었다.

  이 글에서 주로 살펴보게 될 4·19묘지는 1963년 9월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조성되었다. 당시 조성된 4·19묘지는 협소한 공간에 매우 단조로운 구성 요소들, 즉 묘역과 기념탑, 부조, 화신영상, 수호신상 등이 일체를 이룬 기념물, 연못, 그리고 유영봉안소 등이 전부였다.
이는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첫 집단묘지의 탄생이었다. 당시 서울의 도시공간에서 보면, 4·19묘지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위치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4·19묘지가 다른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키는 저항의 장소가 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4·19묘지는 1970년대 초에 유영봉안소가 추가로 건립되고, 몇 번의 묘역 확장과 부대시설 공사가 이루어졌으나, 1993년에 국립4·19묘지 조성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1980년대 거리정치적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시절에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은 아직도 이 때의 모습으로 4·19묘지를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4·19묘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방문을 했지만, 누구에 의해서,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이는 4·19묘지의 방문이 사회운동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기념공간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19묘지를 설계하고, 조형물 등을 제작한 사람은 조각가로 유명한 김경승이었다. 그는 반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파 99인』에서는 대표적 ‘친일 부역자 미술가’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관과 대학에서 발주한 무수한 동상과 기념물 등의 건립에 있어서 중책을 역임한 사람이다. 물론 동학농민전쟁의 기념사업에도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친일 경력 그 자체로 그의 작품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할 수는 없으나, 그가 정치적·역사적 문제의식이 없이 예술 활동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인하대의 재학생들이 1983년과 1984년 두 번에 걸쳐 교내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 철거 운동’을 전개한 다음해인 1985년에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 박사 동상’ 건립이 이루어졌는데, 바로 김경승이 이것을 제작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문민정부 하에서 “역사바로세우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된 국립4·19묘지 조성사업에서는 이 점을 몰랐거나 문제시되지 않았다. 4·19묘지는 묘역과 잔디밭을 수직적 기념탑을 중심으로 한 대칭형 부조벽을 둘러쳐 구분하고, 기념탑 앞에 잔디밭을 기념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배치함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설물들은 시기적으로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충혼탑보다 앞선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국가가 건립한 기념묘지 내의 기념탑과 관련시설들의 기원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국립4·19묘지는 이를 한층 더 강화시켜 기념시설물이 정확하게 좌우 대칭형 구도로 만들었고, 입구에서 묘역과 유영봉안소에 단차를 둠으로써 권위성과 위계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의 집단적 기념묘지에 대한 일반화된 관념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지만, 4·19혁명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검토와 재평가가 충분하게 선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하여 1995년 4월에 완공된 국립4·19묘지는 기존 묘지의 유산들이 재질과 위치를 바꾸었을 뿐 그대로 유지되었다.

  30여 년의 세월 속에 4·19묘지의 대표적 상징물로 굳어져 버린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석벽부조, 화신영상 그리고 전면부의 좌우측에 세워진 수호신상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4·19묘지 내의 ‘4·19혁명 기념관’

  4·19혁명과 관련된 전시시설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국립4·19묘지 내에 위치한 ‘4·19혁명기념관’이고, 다른 하나는 4·19혁명기념도서관 1층에 설치된 ‘정신계승홀’이다. 본래 4·19묘지는 묘역과 유영봉안소만 있는 말 그대로 묘지형 기념공간이었으나, 국립4·19묘지를 조성하면서 기념관이 구성요소로 포함되었다.

  이 기념관은 이용공간의 우측 하단에 위치해 있으며, 규모는 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총 512평인데, 전시 및 영상·세미나실의 공간 등으로만 보면 218평이다. 기념관 1층의 전시실은 4·19혁명의 연표와 배경, 전개과정을 담은 당시의 사진들과 발표된 선언문, 그리고 두 곳의 디오라마(diorama)를 통해, 2층 전시실에는 유물 전시와 정보검색 코너 등을 두고, 국립4·19묘지가 조성되는 과정을 몇 개의 그림과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기념관의 전시공간과 전시물들은 1995년에 개관한 이래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를 이 곳이 상설공간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기념관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살아있는 기념관이 방문객들의 흔적과 이야기를, 그리고 다양한 새로운 주장을 담아내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곳이라고 한다면, 이곳은 1960년 3월과 4월에서 멈춰버린 공간이다.
  이 점은 사이버 공간에 있는 국립4·19묘지의 홈페이지에서 기념관과 관련된 내용을 찾을 수 없다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한편 건축학적 측면에서 보면, 기념관의 외형은 한옥 지붕의 형태에서 유추했다고 하나,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현대적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의 전면부는 유리로 마감되어 묘지를 조망할 수 있게 했는데, 이 조망시설들이 대부분의 전시공간에서 중요하게 고려되는 조명 연출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리고 전산실의 관람 동선이 중복되어 혼란스럽고, 내부에 줄지어 늘어 선 기둥들로 인해 전시공간으로서 아쉬움을 지니고 있다.
 
  ‘서대문 경무대’에서 4·19혁명기념도서관으로

  4·19혁명기념도서관은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많은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 때에 이곳은 소통령 이기붕의 집(일명'서대문 경무대')이었으며, 행정구역상 서대문구 충정로 1가 36-1번지였다. 4·19혁명 당시 시위군중의 공격으로부터 끝까지 경찰의 방어선이 구축되었던 곳이 크게 세 지역이었는데, 경무대(현 청와대) 앞과 중앙청(경복궁) 앞, 그리고 바로 이기붕의 집 앞이었다. 따라서 시위대와 경찰은 이 일대에서 계속 충돌하였고, 이에 비례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역사성으로 인해 4·19혁명기념도서관은 4·19혁명의 역사적 현장과 일치한 곳에 세워진 기념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 직후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자 4·19유족회는 이 집을 접수하여 사무실과 유영봉안소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4·19혁명의 주체와 동기가 학생들의 순수한 의거로 고착되면서 '희생자들이 못다 이룬 진리 탐구와 과학기술의 연마를 도우며 그들의 정신을 청년학생들에게 계승 발전시킨다는 목적' 하에 도서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기념도서관의 개관 비용은 재일 교포와 재미유학생들이 보내준 성금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곳에 도서관이 설치된 이후에 역대정권들은 이 도서관을 없애려고 수 차례 시도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서관은 지하 2층, 지상 7층의 연건평 2,210평의 규모인데, 주요 공간은 이 건물의 명칭과 같이 도서관에 필요한 시설들이다. 이 외에도 4·19혁명 관련 단체들이 입주해 있으며, 1층에는 사진 전시실 및 종합영상실, 그리고 세미나실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사진 전시실인데, 4·19혁명 당시의 사진들과 연표들로 채워져 있다.

  사진들은 이미 공개된 것들이지만, 촬영은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도서관은 1994년 11월 현상공모를 통해, 1999년 4월에 준공되었는데, 서울 도심에 위치해 있어서 효율적 공간 이용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할지라도, 수직적이고 획일성이 강조되어 마치 법원이나 검찰청과 같은 관공서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건축사 서현이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에서 “권위에 대한 피해의식을 지닌 집단들이 그 피해의식을 보상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런(권위적인 것처럼 보이는) 건물을 요구하여 왔다”라는 지적이 떠올랐다.

  4·19혁명의 계승과 미래

  1960년 당시 열혈 청년이었던 4·19혁명 관련자들이 중년을 훨씬 넘어버린 오늘날, 우리에게 4·19혁명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한국의 사회운동, 특히 학생운동에 있어서 4·19혁명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과 실천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견인차였다. 그 누구도 4월혁명이 한국의 사회운동에 정신적 그리고 실천적 자산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숙고해 보면, 4월혁명을 주도하던 세대가 생각하던 의의와 계승의 내용과 후세대가 느끼는 그것은 많은 점에서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보다 발전된 한국의 민주화를 희망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공감하지 않은 부분들도 있다. 4월혁명이 진정으로 계승 및 전승되기 위해서는 4월혁명에 의의가 언제든지 현재의 관점에서 다시 씌어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노력들이 있다고는 하나, 더 많은 경우는 1960년대의 사건으로 자신을 스스로 구분하고,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지향하는 흐름과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다양한 기념공간과 시설도 필요하지만,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는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친 신동엽의 시 구절을 성찰하면서 4·19혁명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 나갈 지 고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이 자신들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후대가 자신에 대해 알아주기를 호소하기 이전에,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생각과 꿈을 껴안고, 결합할 수 있는 지점들을 탐색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글 정호기(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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