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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주영(51, 송파초등 교사)은 심한 혼란을 겪는다. 눈을 씻고 봐도 학교 안에서 교육현장다운 풍토를 찾을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는 사회뿐 아니라 학교의 교육현장까지 깊게 파고들어 아이들은 병들고 교사는 노예가 되어 있었다. 젊은 이주영은 분노했고 학교의 비민주적인 독재현실에 절망했다. 희망의 싹은 어디에도 없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그는 이오덕의 교육수필집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를 만난다.
이오덕은 책머리에, 2차대전 때 집단학살수용소로 끌려가는 기숙사의 아이들을 보고 “아이들을 일분간도 방치할 수 없다.”면서 자기를 구조해주려는 손길도 뿌리치고 아이들을 끌어안은 채 함께 끌려가 학살당한 폴란드의 한 교육학자의 예를 들며, 나는 그 폴란드 학자의 백분의 일의 양심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부끄럽고 죄스럽다고 밝히고 있었다.
이주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교사는 자칫 본분을 잊고 사이비로 전락하면 ‘권력의 개’, 지배계급의 ‘집 지키는 개’일 따름이라는 사르트르와 니장의 말처럼, 그 무렵 교사는 거의 모두 독재를 편들고 선전하는 이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이 쉰을 넘긴 산골 초등학교 교장 이오덕은 달랐다. 그의 글엔 한 치의 두려움이나 비겁함이 보이지 않았다. 이주영은 부끄러움에 몸을 떨다가 한달음에 그를 찾아갔다. 비로소 그는 큰 스승을 만나 민주교육·민족교육·인간교육·생태교육·일과 놀이를 포괄하는 ‘삶을 가꾸는 교육’, ‘참교육’이라는 교육사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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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죽이는 학교교육
이오덕은 1925년 11월 14일 경북 청송군 구석들(덕계리)에서 독실한 기독교인 아버지 이규하와 어머니 정작선 사이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누나들의 보살핌으로 자란 그는 소학교와 공립영덕농업실수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 직원으로 특채되었으나, 뛰어노는 아이들이 좋아 독학으로 교원시험을 통과하고 교사의 길로 들어선다. 그때가 1944년, 이오덕의 나이 19세였다. 그로부터 그는 42년 동안 경상도 일원의 초·중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가 살아온 시대는 우리 겨레가 멸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온갖 도전을 받았던 시대이고, 그 도전을 수많은 사람들이 애써서 힘겹게 헤쳐가면서 극복해온 시대였다.
이오덕이 보낸 어린 시절은 일본 제국이 민족 수탈과 말살정책을 가파르게 강화하던 시대였다. 이에 맞서 국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이 이어졌으며 어린이·여성·노동자·농민의 해방 투쟁이 전개되었다. 수많은 백성이 겨레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바쳤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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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된 뒤에는 좌·우익의 대립이 온 나라를 휩쓰는 가운데 남북에서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업은 세력들이 단독정부를 세워 민족분단을 기정사실화했다. 곧이어 남북은 예정된 민족참상의 비극인 6·25전쟁을 겪는다.
교육현장 역시 거짓과 혼란의 수렁이었다. 말만 민주·민족교육을 주장하는 새로운 교육이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반공의 기치를 내세우며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켜 그 내용을 학생들에게 달달 외우게 했다. 일제식민지 노예교육과 다를 게 없는 거짓교육이었다. 권력을 유지하려고 교육을 정치 시녀로 전락시키고 학교를 이념의 교육장으로 이용했다. 이런 잘못은 공화당 군사독재와 유신독재정권 그리고 1980년대 5·18 민중의 피를 짓밟고 탄생한 전두환 독재정권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이오덕은 교직 생활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교육현실은 일제식민지 노예교육을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일제와 서구에 대한 겨레의 열등의식을 심화시키는 것이었고, 아이들이 중심이 아닌 정치권력의 도구로 변해버린 학교의 비리와 모순에 끊임없이 절망했다. 그건 가혹한 고문과 같아서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라고 말한다.(『내가 걷는 길』, 1979)
산골 초등학교 교장 이오덕
1975년, 이오덕은 경북 봉화군 삼동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방학 때 덕성여대 염무웅(65) 교수가 이오덕을 찾아왔다. 『창작과비평』의 편집인이기도 했던 그는 이오덕과 교류를 해오던 터였다. 그는 그날 이오덕에게서 아주 소중한 책을 빌려갔다. 월북한 오장환이 옮긴 ‘예세닌 시집’과 이용학 시집이었다. 1947년에 출판된 것이어서 당시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그는 원본은 이오덕에게 돌려주고 복사본을 신경림, 백낙청 등과 나누어 가졌던 것인데, 그해 늦가을 어느 날 신경림이 그것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흘렸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중앙정보부 문학담당자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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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은 자유실천문인협회(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를 중심으로 많은 문학인이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며 반독재 반유신 운동을 펼칠 때여서 중정 산하에 문학담당부서를 따로 만들어 중요 문인들을 대상으로 전담형사를 붙여 감시하던 때였다. 관련된 이들이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꼭 그 사건으로 인한 것은 아니어도, 염무웅은 다음 해에 해직을 당하게 되고 관련자가 남산에 끌려가 어처구니없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염무웅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 이오덕을 잡으러 경상도 산골 십리도 넘는 길을 걸어서 찾아갔던 형사는 이오덕의 소박하고 성실한 삶에 감동하여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임무를 한스러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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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재 권력의 집요한 탄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정권이 바뀌어도 그 짓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가운데에 가장 어처구니없고 악랄한 사례로는, 1986년 벽두부터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가 앞장서서 몇 권의 어린이 책을 예로 들면서 “아동문학에도 민중론이 침투되어 있다.”라며 여러 언론을 통해 비난하고 나선 일을 손꼽을 수 있다. 그 예로 이오덕의 『개구리 울던 마을』에 실린 두세 작품 중 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좌경용공문학이라고 비난을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말>지는 이오덕의 예시 작품 전문을 제시하면서 얼마나 악의에 찬 거짓된 비난인가를 반박했다.(1986년 3월 25일자, 98~99쪽)
“학교로 온 공문에, 이오덕의 시집 『개구리 울던 마을』을 불온서적으로 적시하고 도서실에 비치되어 있으면 죄다 수거하라고 명령하고 있었어요. 불온서적으로 판단하게 된 이유는 더 기가 막혔어요. 이오덕의 동시 중에, 공부시간에 장난치다 걸려 손들고 벌서던 아이들이 수업 끝나는 종이 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다시 골마루에서 뒤잽이하며 장난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까라 까! 쓰러뜨려라! 넘어뜨려!’ 이렇게 아이들 말로 표현한 부분이 ‘현저히 폭력을 조장할 만한 위험한’ 내용이라서 불온서적으로 분류한다는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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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지역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도종환(52, 시인)은 그때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무렵 전두환 독재정권의 악랄하고 치졸한 교권침해 사례를 덧붙였다.
“<문제교사 식별법>이란 공문이 있었어요. 1번이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열성적인 교사’였어요. ‘학급문집·학급신문 만드는 교사’, ‘아이들에게 풍물을 가르치는 교사’ 이런 교사들이 다음 순위를 차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도종환은 ‘학급문집·학급신문 만드는 교사’가 거기에 들어간 것도 그 일을 일찍부터 해오고 있는 이오덕과 그를 따르는 교사들을 염두에 두고 그랬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단순하고 과격 무식한 독재정권의 탄압은 실제 이오덕을 따르는 글쓰기회 교사들과 많은 이들에게 징계와 좌천, 해직 등의 불이익을 주었다.
그러한 탄압은 결국 교사들의 자주적인 단체인 ‘민주교육실천협의회’(1986. 6. 15, 공동대표 이오덕, 성내운, 문병란)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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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꾸는 교육
이오덕은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학교교육이 민주교육, 민주주의 삶을 가르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처음은 학교의 학급에 있는데, 아이들을 교육한다는 것이 군대식 훈련이 되고, 약자를 무시하고 경쟁심이나 북돋는 것으로 가면 안 될 것이라고 했다. 민주주의 삶을 가르치는 교육은 바로 우리 겨레의 혼을 이어가는 교육이며 분단과 통일이라는 현실은 민주교육, 민족교육을 올바로 해야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민주교육의 목적을 ‘함께 살기 교육’이라고 하는 까닭도 그런 데 있었다.
‘함께 살기 교육’이란 가난한 아이들과 부자 아이들이 함께 살아야 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과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함께 살아야 하고, 약한 아이와 튼튼한 아이, 어른과 아이, 남녘과 북녘 아이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교육인 것이다. 이렇게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치는 교육’은 민주교육을 바탕으로 해야만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다.(이주영, 2004, 「이오덕의 교육사상 연구」, 교육학석사논문)
이오덕은 어린이들이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보고 솔직하고 자세히 표현할 수 있어야 자신의 삶을 바르게 가꿔나갈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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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교육에서 다른 어떤 일보다도 앞세워 이뤄가야 할 과제가 있다면 아마도 어린이에게 인간다운 마음을 지켜가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그 까닭은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이마저 인간성을 차츰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성 수호의 교육은 어린이 각자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살려나가도록 하는 데서 출발한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사의 책임이 무엇보다 크다고 강조하였다.(『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1984)
“선생님은 저에게 교육자의 삶을 새로 주셨습니다. 길을 가르쳐 주시고 바르게 가라고 채찍질 하셨습니다. 지난 날,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민중을 핍박한 까닭이 그들을 가르친 교육자들에게 있다고 한탄하셨어요. 특히 초등학교 때 그들을 맡아 가르친 교사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하셨지요.
선생님은 겨레 수난의 20세기를 비판적 지식인으로 강직하게 사신 분입니다. 해방 뒤, 이념교육과 독재정권의 시녀로 짓밟히는 교육현장에서 42년 동안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교육이론을 세워 몸으로 실천하셨고 어린이 문학을 창작하고 비평했습니다.”
1977년부터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와 어린이도서연구회,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에서 줄곧 이오덕과 함께 교육운동을 해온 이주영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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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인기
1960년 출생. 1999년 『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받음. 현재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작가회의 회원
사진제공 이오덕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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