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홍남순은 ‘긴급조치 전문변호사’라는 별칭을 얻는다. 『함성』지 사건(1973년), 3·1민주구국선언(1976년), 긴급조치 9호로 투옥된 고영근목사사건(1977년), 시 ‘겨울공화국’으로 파면된 교사 양성우 시인의 노예수첩필화사건(1977년), 긴급조치 9호로 투옥된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의 우리의교육지표사건(1978년) 등 40여 건에 달한다. 그는 전국 곳곳에 발품을 팔았다.
“노인네가 다들 미쳤다고들 했다. 서울이건 부산이건 내 돈 들여가며 뛰어갔으니까. 그러나 한 번도 고달프거나 짜증나지 않았다. 시국의 물줄기는 바꿀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내 힘으로 정의의 작은 불씨를 일으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5·18민중항쟁 이전에 광주의 민주화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우리의교육지표사건’으로 구속된 송기숙은 혼자 격리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정서불안 상태였던 그는 홍남순의 변론을 들으며 가슴에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 그 재판풍경을 변호사 홍성우는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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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부장판사가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송기숙 교수를 고압적인 언동으로 깔아뭉갰다. 그걸 지켜보던 홍남순 변호사는 ‘판사가 피고인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판사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예끼’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판사는 홍 변호사님이 짧게 내뱉은 그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금세 얼굴색이 발그스름하게 변하면서 고개를 아래로 잠시 떨구었다. 나는 그때의 홍 변호사님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그걸 보면서 ‘광주란 이런 동네구나. 광주사람들끼리의 인정, 교류 같은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홍남순 영감이 아니면 저렇게 판사를 나무랄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판사를 그렇게 나무라는 사람은 처음 봤다.”
5·18은 민중혁명이다!
1980년 5월 26일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하는 계엄군에 맞서 홍남순은 16인의 수습위원들과 함께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나선다. 그날, 그의 뒤를 따른 어느 젊은이의 회고다.
“도청을 나와 한참을 말 없이 걷고 있는데, ‘어이 갑제, 나는 살 만큼 살았네만 자네는 참 안 됐네.’그래요. 그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자네는 아직 젊으니 앞으로 할 일이 많네. 그러니 몸을 피신하게.’라고 말할 텐데, 홍 변호사는 그게 아니었다. 광주시민이 죽어 가는데 젊고 늙음이 무슨 필요 있겠냐는 거지요. 사실, 저도 그 자리를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거든요.”
1980년 5월 21일, 죽어도 집에서 죽어야겠다고 서울에서 광주로 돌아온 홍남순은 시내병원을 둘러보았다. ‘병원 복도 여기저기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가마니를 덮어놓은 시신들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 눈과 머리가 짓이겨졌거나 총상을 입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1980년 12월 17일 홍남순의 항소심 재판이 열린 육군고등군법회의 법정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살만치 살았고, 저기 있는 두 여자 분들(이애신, 조아라)은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며 불의에 항의하고 올바르게 살았는데 무슨 죄가 있나.’ ‘청년들이 무슨 죄가 있나, 다 석방해야 한다. 나이 먹어가면서 법조인으로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수습위원 활동을 부당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홍남순이 최후진술을 하는 동안 법정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방청석에 앉은 가족들뿐만 아니라 구속자들도 흐느껴 울었다. 5·18민중항쟁 재판은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홍성우 변호사)라는 말대로, 각본에 따라 검사는 무기징역을 내렸다. 그러자 생사가 오락가락 하는 상황을 지켜보던 셋째 아들 기섭이 냅다 ‘이 개자식들아, 이게 재판이냐!’하고 재판장을 향해 의자를 집어던졌다. 구속자 가족들은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 법정에서 나와 버렸다. 재판관들이 피신하는 바람에 재판은 중단되고 헌병대원들이 진압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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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 홍남순은 5·18민중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고 시민들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온 힘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전두환 군사정권의 탄압이 워낙 심한 터라 사람을 모으고 민주화운동 단체를 만들기가 힘들었다. 1983년 복권이 된 그는 민주화운동의 물꼬를 트는 데 주인공으로 나섰다.
“젊은 동지들과 박석무, 송기숙 교수 등 몇 사람이 찾아와서 나의 고희를 기념하는 논총집도 하나 내고 조촐한 기념행사라도 한번 꾸려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모두 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동지들이며 이 나라의 양심과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서로 자신들의 글을 쓰고, 거기에 덧붙여서 이 나라의 정치·경제·역사·인권 등을 폭넓게 논해보자는 의견들이었다.” 고희 논총집에 참여한 필자들(문익환, 백기완, 리영희, 이호철, 유인호, 송건호, 이효재, 김진균, 한승헌, 이우정, 안병무, 성래운, 백낙청)을 몽땅 밖으로 내보내면 대한민국이 조용할 거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발간위원회는 책을 만들었다. 논총집 증정식이 열린 곳은 광주 YMCA 무진관이었다. 재야인사와 야당 정치인 그리고 민주화운동가 수백 명이 모여 커다란 행사를 벌렸다. “그날 행사는 5공 군부세력에 의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던 민주진영이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기지개를 켜는 발대식이나 마찬가지였다.”(박석무의 회고) 비로소 5·18민중항쟁 이후 첫 공식 대중집회가 열린 셈이었다. 박석무는 민주화운동을 활성화하는데 홍남순이 기여한 점을 말한다. “조직을 만들기 위한 싹을 마련한 셈이다. 첫 결실로 구속자가족협의회가 만들어졌고, 5·18광주민중항쟁 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로 나아간다. 홍남순은 민주화운동 조직을 만드는 씨앗이 된 셈이다. 조직의 ‘장’을 맡음으로써 홍 변호사는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5·18 광주항쟁 희생자 위령탑에 민중혁명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압박하는 군사정권에 홍남순은 항의했다.
“세상과 역사는 유동적이고 또 그것들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거다. 지금의 정의가 나중에는 불의가 되기도 하고, 또 그것이 반대의 입장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동학이 무엇인가? 그들 역시 당시에는 만고의 역적으로 삼족이 결딴나는 무거운 형벌을 받았지만 시대가 바뀐 지금에 와서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민중은 곧 백성을 일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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