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소요를 일으키는 대가로 배후세력인 김대중에게 얼마의 자금을 받았나? 그 돈을 누구에게 전했나? 전남대 학생회장에게 주었나?’ 5명이 돌아가면서 잠을 안 재우고 끊임없이 질문을 되풀이했다.
“6·25때 적 치하에서도 동조하지 않는다고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사람이다. 그런 나를 공산당으로 몰려하다니 처음부터 각본을 다시 짜라. 군법무관으로 수사를 담당했던 나다.” 홍남순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는 각본을 짜놓고 거기에 끼워 맞추려는 검찰관에게 수사를 제대로 하라고 호통을 쳤다. 69세 홍남순은 팬티만 입고 고문을 받았다. 시멘트 바닥인 지하실에서 모포 한 장 없이 떨면서 잠을 청했다. 밤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헌병대 영창 마당에서는 전봇대처럼 큰 통나무를 젊은이들과 함께 들고 ‘우로 어깨, 좌로 어깨’라는 구령에 따라 봉체조를 감당하기까지 했다. 그에게 들씌운 죄목인 ‘무기회수 방해죄’ ‘학생교사죄’ ‘정부전복기도’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어린 너희들에게 맞아죽느니 할 말이나 당당히 하고 가자’라는 오기가 생겼다.
“이 나이에 고문을 받고 어찌 살겠나.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차라리 나를 충장로 네거리에 이대로 끌고 가서 총으로 쏴 죽여라. 그러면 광주시민들이 불쌍하다고 동정이나마 해줄 거다. 아무도 없는 지하실에서 맞아죽기는 싫다. 제발 내가 원하는 대로 죽여 달라.”
가족들은 홍남순이 감옥에서 생을 마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도 자신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고통을 피눈물로 지켜본 셋째 아들 기섭(52)은 말한다.
“5·18로 잡혀간 사람들 대부분은 고문을 받고 강압에 굴복해서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에 그대로 지장을 찍었지만, 아버지는 버텼다. 모진 협박과 고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지장을 안 찍었다. 수사관들은 홍남순을 5·18의 수괴로 몰려고 했건만 끝내 실패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맞추려고 몇 달을 시간을 끌었어도 홍남순을 수괴로 만들지 못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 군부독재에 저항하다
어느 날 편지봉투에서 떼어낸 우표를 홍남순은 물에 씻어서 말렸다. 무엇하냐는 아들 기섭의 물음에 그는 다시 쓰려고 그런다고 답했다. 그때까지 홍남순은 헌 우표를 다시 쓸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살았다.
“아버지는 돈을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돈을 축적하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알았죠. 집에 죽이 끓는지 쌀이 있는지도 모르셨고 도무지 경제 감각이 없었습니다. 명색이 판사 부인이라는 어머니가 바느질하고 돼지 키워서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니까, 사건이 들어올 리 없죠. 안기부, 경찰이 집에서 진을 치니 누가 사건을 맡기겠습니까? 전기세, 식량까지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아들 기섭의 말대로 홍남순이 쓰러지고 나서 확인한 통장에는 잔고가 100만 원이 안 되었다. 홍남순은 사무실에 걸어놓은 시궁절내현(時窮節乃見, 궁할 때 그 사람의 절제된 삶을 알 수 있다.) 이라는 송나라 말 재상이자 문장가인 문천상이 좌우명으로 삼은 글귀를 평생 마음속에 두고 살았다. “조선 500년을 통치하고 유지하며 견인차 역할을 하고 그 밑바닥이 되어 소금노릇을 한 것이 이른 바 ‘선비정신’이다. 선비는 낮이면 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거나 비가 오면 글을 읽고 쓰며 도학을 연구하고, 아무리 배가 고프고 주려도 도덕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또한 선비는 자기 자식뿐만이 아니라 후학, 후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봄으로써 사회를 교화시키고 이끌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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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유공자 보상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그의 선비 정신은 한결같았다. 홍남순은 자신이 말한 대로 ‘시민의 도리를 다했을 뿐이지, 보상을 받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다’라고 거절했다.
5·18 때 수사관들이 궁동 집에서 수첩을 찾아냈다. 변호사 사무실의 수입과 지출을 적은 장부였다. 수사관들은 탈세나 비리 사실을 캐내려고 샅샅이 조사했으나 아무런 꼬투리를 잡지 못했다. 그러자 사무장인 정광진(65)을 두들겨 팼다. “변호사님 댁을 여러 차례 수색한 것으로 안다. 그 낡은 집에 텔레비전 한 대가 있던가? 양심수 변론하는 분이 무슨 비리가 있겠나?” 사무장 정광진은 엉덩이 살이 뭉개지도록 68일이나 고문을 받으면서도 홍남순이 비리가 없음을 주장했다. 결국 270건을 뒤지고도 비리를 못 찾아낸 수사관들은 홍남순의 깨끗함에 탄복하고 말았다.
젊은 날에는 광주 시내 사진관에 홍남순의 잘 생긴 얼굴사진이 안 걸린 데가 없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과 목숨을 걸고 싸운 그이지만 선비답게 풍류를 즐길 줄 알았다. 젊은이들과 술도 마시고 시조도 부르고 서화와 고서를 사랑했다. 5·18 때 수감되자 가장 걱정 된 것이 자식들의 학비였다. 헌데도 홍남순은 그림을 파는 대신 집을 처분해서 학비를 마련하라고 하였다.
홍남순은 태권도 유단자이기도 하다. 막내아들 영욱(46)은 어린 날을 떠올린다.
“3선개헌 반대로 나라가 떠들썩할 무렵인데, 아버지가 경찰 곤봉에 맞으면서도 데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세 많으신 아버지는 ‘경찰이 곤봉으로 배때기를 쑤시면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고 그 아픔을 표현했죠. 회갑 때부터 아버지는 경찰에 맞서기 위해 태권도를 배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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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죄로 몰려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군대 영창에서도 홍남순은 선비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에 지장을 찍어주고 불안에 떠는 송기숙을 부른 그는 느닷없이 주간지 『선데이서울』을 펼쳐 보였다. 여자들 사진을 가리키며 그 가운데 예쁜 여자를 한 명 고르라고 했다. 송기숙은 속으로 홍남순이 실성했나 의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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