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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는 3·1절 57주년 기념 미사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전국에서 올라온 20여 명의 사제단 신부들이 공동 집전한 이 날 미사의 분위기는 여느 때처럼 경건하고 장중했다. 가톨릭 신자로서 미사에 참석한 공화당 국회의장 서리 이효상은 잠시 장내를 둘러보았다. 신자석에 앉은 700여 명의 사람들 중에는 더러 개신교 신자, 비신자도 섞여 있었지만, 3·1절의 역사적 의미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인 명동성당의 위치를 돌아볼 때 이해하지 못할 풍경은 아니었다. 김승훈의 강론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효상은 이 미사에 대해 별다른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강론대에 선 김승훈은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앞둔 1975년 2월 3일 공개서한을 통해 자신과 같은 가톨릭 정치가들의 반성..
1963년 9월 25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였다. 서울 신당동성당 보좌신부 김승훈은 이날도 많은 사람을 만나며 분주히 돌아다니다 저녁 무렵 성당으로 돌아왔다. 비를 맞은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춥고 떨려서, 그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식사며 청소며 사제관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식복사 아주머니는 몸살기를 보이는 젊은 신부가 안쓰러워 그의 방 아궁이에 연탄불을 넣었다. 식복사 아주머니가 ‘좋은 마음’으로 넣어 준 그 연탄불이 화근이었다. 그 방은 일 년 내내 불을 넣어 본 적이 없는 온돌방이었다. 연탄가스 신부님 김승훈은 다음 날 아침 미사 때가 되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교우들이 사제관으로 달려왔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연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