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세계의 민주화운동 (31)
함께쓰는 민주주의
로마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더불어 세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글의 주제인 로마 공화정의 역사는 로마사 전체에서 보면 왕정과 제정의 중간 단계에 속한다. 근대 역사철학의 완성자인 헤겔은 로마와 그리스는 세계사에서 소수이긴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 민족이라고 평가한다. 기독교와 더불어 로마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유럽 지역을 문명화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그는 생각한다. 로마와 기독교를 통해 유럽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자각을 바탕으로 세계사를 새로운 단계로 도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헤겔의 시각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로마의 역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 제국..
『희망세상』은 2008년 연속 기획으로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1987년 6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민주화를 이끌어낸 후, 한국 사회는 최초로 이상이나 이론이 아닌 현실과 실천으로서 민주주의를 대면해야 했다. 그 후 2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후 직면했던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시작된 경제적 삶의 급속한 황폐화 속에서 더 이상 희망의 언어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 어느 시기보다 민주주의의 원활한 작동을 요청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핵심은 민주주의가 초래한 결과가 아닌 민주주의 결핍의 결과이기 때문이며, 역사적으로도 다수의 보통 사람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와 갈등을 해소하는 최선의 정치는 여전히 ‘민주주의’라는 걸..
19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사회·경제적 파장 지난 1997년 7월 태국 통화인 바트화의 폭락으로 시작된 동아시아 경제위기는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던 동아시아 경제체제를 일거에 뒤흔들어 놓았다. ‘기러기떼 모형’의 성장대열의 선두에 서 있던 일본에 대해서는 이미 ‘잃어버린 90년대’라는 말이 나오던 터였다. 사실상 동아시아 경제 파국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세계은행은 이미 1993년에 발간한 『동아시아의 기적』에서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과 같은 동남아 신흥공업국들이 동북아 신흥공업국들보다 더 좋은 발전 모델이 될 수 있다고 극찬한 바 있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경제위기가 동아시아에서 발발하고 이 위기가 확산일로의 경향을 보이게 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돌연 동아시아 위기의 원인을..
동아시아의 한 흐름이 된 민주화 아시아가 주목을 받고 있다.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확산이 그 이유다. 특히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은 호혜적인 경제유대를 뜻하는 ‘기러기떼 모형 성장’의 결과로 추앙받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러기떼 모형 성장’이란 비교적 앞선 동아시아 국가군의 산업과 기술이 사양화하면, 그 다음 단계의 국가군으로 이전되어 그곳에서 경쟁력을 갖게 되고, 이 곳에서도 사양화하면 다시 그 다음 단계 국가군으로 이전되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동아시아 모든 국가의 산업능력이 향상되는 과정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아시아의 기러기떼 모형의 성장도 1997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전환 국면에 들어갔다. 위기는 동아시아 고유의 성장모델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위기는 그늘만..
캄보디아의 슬픈 역사 킬링필드. 인구 700만 가운데 2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캄보디아의 비극이다. 1975년 친미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크메르루즈는 지상 낙원을 건설한다며 사람을 죽이고 또 죽였다. 광기로 무장한 이 극단적 공산주의자들이 세우고자 했던 것은 도시 없는 자급자족형 농경사회였다. 우선 ‘불순분자’로 분류된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도시에서 쫓겨나 집단농장으로 가야 했고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굶주려 죽었다. 살아서 도착하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노동과 굶주림 그리고 무슨 이유로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은 죽어나갔다. 죽음과 죽음의 공포가 캄보디아를 휩쓸었다. 사실 죽음의 그림자는 킬링필드 이전..
끝없는 군사독재 파키스탄회교공화국(Islamic Republic of Pakistan)은 면적이 한반도의 3.5배나 되고 인구는 1억 5천 정도로 비교적 큰 국가이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반복되는 군사독재정권이 집권해 왔다. 파키스탄은 독립 후 58년 중 약 30년 동안을 군사정권이 통치해왔고 앞으로도 이 기간은 늘어날 가능성이 많다. 이렇다보니 파키스탄에서 민주주의가 정착될 기회는 자꾸 멀어져만 가고 있다. 1947년 8월 인도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파키스탄은 1950년대 후반 첫 군사독재를 맞이하였다. 1958년 10월 아유브 칸(Ayub Khan) 장군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하고 상·하 양원을 해산하고 1956년 헌법을 폐지한 이후 11년을 통치했다. 그러나 아유브 칸은 196..
시민운동의 분수령 일본의 시민운동이 일본의 정치를 얼마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일당(자민당) 우위체제의 내각책임제인 일본에서 시민운동이 중앙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대부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활동가들조차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대신 시민활동가들은 국가 혹은 중앙의 변화보다는 자신들의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실험을 통해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변방 곧 지역에서 변화를 도모하여 중앙을 에워싸는 변화의 방식에 기대를 걸고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의 시민운동이 중앙정치에 대하여 이토록 무력해진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전후 일본의 시민운동사에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 두 가지 사건을 살펴보자. 하나는 1960년대 격렬했던 안보투쟁이..
중국의 민주주의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89년 6월에 발생한 천안문사태다. 서구에서는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이후 경제변화가 정치변화를 촉진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예측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980년대에 덩샤오핑 등 중국공산당 내의 개혁파들이 경제개혁과 함께 정치개혁을 주된 의제로 강조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예측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천안문사태는 중국에서의 민주주의가 그처럼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천안문사태는 자유주의적 경향에 동정적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보수파 원로들의 비판을 받고 총서기직에서 축출되었던 후야오방의 1989년 4월 사망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베이징의 대학생들은 중국공산당에게 후야오방에 대한 재평가를 ..
지난 4월 말 베트남에서는 제 10차 공산당대회가 열렸다. 당 대회는 공산당이 국가 전체를 지도하기 위한 지침을 채택하고 지도자들을 뽑기 위해 매 5년마다 여는 것이다. 이번 당 대회에서는 ‘도이머이’(Doi Moi, 쇄신) 20주년을 맞아 지난 성과를 총결산하고 향후 5년 동안의 발전전략을 수립하며 베트남을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선출하였다. 이번 대회에서는 이전보다 당 내외 민주화의 목소리가 커 격렬한 토론이 전개되었고 그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많은 변화들, 즉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 허용, 당 총비서 선출시 복수후보 추천 등이 시도되었다. 이번 제 10차 당 대회는 가히 정치개혁의 대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더 진전된 ‘민주화’의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베트남이 1986년 제 6차 당 대회에서 전면적 ..
원론적으로 말해서 민주화란 국민과 민중이 주인 되는 것, 즉 폭력 수단을 독점한 국가(state)로부터 사회(국민과 민중)가 자유와 평등권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와 평등권이 주어졌을 때 주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갖추게 된다. 또한 인류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 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권력 분립의 제도화를 통해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해왔다. 오늘날의 민주화란 최소한의 생존권, 즉 의식주 문제의 해결까지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이슬람을 국교로 하고 있고 종교생활과 정치생활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은 이슬람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신권(神權)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군주와 대통령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알라로부터 부여받은 통치권을 자신이 행사하고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