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사료이야기 (55)
함께쓰는 민주주의
잊혀져 가는 역사를 되살리는 생명의 기록. 故 송건호 선생의 기증자료 1975년 유신의 칼바람에도 직필을 놓지 않았던 동아일보 기자들의 강제 해직에 책임을 지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해직 당했다. 아니 그는 해직 당한 것이 아니라 언론자유를 외친 젊은 기자들을 해직하라는 사주의 압력에 저항하여 젊은 기자들이 해직되기 전 날 스스로 사표를 던졌다. 돈이 없어 술과 담배를 배우지 못했다던 사람, 속세와 타협하지 않고 한길을 가려면 자기 주변 정돈을 잘해야 한다고 당부하던 사람,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많은 말을 늘어놓지 않았던 사람, 그는 절대 침묵과 고독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다. 故 송건호 선생은 언론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다. 그는 언론계의 거목다운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1954년 대학 재학 ..
현재 사업회 사료관은 기록물의 수집정책 및 방법 등 기능적 측면에서 볼 때 조직형 보존소가 아니라 수집형 보존소(Collecting Repository)이며, 기록물의 법적인 수집대상이 공기록물보다는 사기록물에 의존한다. 따라서 사료관의 기록물은 특성상 한 조직의 내부 자료가 다량 수집된 경우가 드물고 대부분 다양한 출처의 자료가 소량씩 수집되어 있는 매뉴스크립 컬렉션(Manuscript Collections)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 사례로 전교조 초대위원장을 역임했던 윤영규 선생의 기증자료(‘윤영규 컬렉션’)를 통해 선생의 삶을 반추해 보고자 한다. 선생은 대학시절부터 차곡차곡 모아온 수십여 상자의 자료를 지난 2002년 사업회에 기증했다. 선생이 기증한 13,000여 건에 달하는 자료는 한신대 재..
“지금 농촌은 돈에 화신이 들린 것 같아. 열대여섯 살 고사리 손들이 돈을 벌겠다고 도시로 나간다. 식모살이로, 공장으로 말이다..... 어린 자식은 돈을 벌겠다고 도시로 나갔으니 일손은 모자랄 것이고 제 아비 값싼 곡간에 자식 놈 값싼 노임이라 죽어라 빌어먹을 놈들 가난할 수밖에 , 이래도 농민은 게을러서 못사는 것일까? 곡가는 다른 물가에 영향이 크니 인상 할 수 없고, 농촌에서 사용하는 생활필수품은 날만 새면 올라가니 또 한번 가난해 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70년대 이후의 진보적 기독교 사회운동에 관한 고찰」중에서, 서영섭)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외향적으로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우리사회의 일부분을 포기한 채 이루어낸 반쪽자리 성공이었다.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은 실제로 산..
캐나다에서의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향한 열망 이수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1986년 1월 16일 대통령 전두환은 국정연설에서 86․88을 위한 ‘큰 정치’로써 임기 내 개헌불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어 법무부는 헌법논의를 빙자한 범법행위에 대해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거듭 천명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은 1983년 2·12 총선 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직선제 개헌논의를 봉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개헌논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986년 2월 4일 서울대학교에서 15개 대학 1천여 명이 모여 ‘파쇼헌법철폐투쟁대회 및 개헌서명운동 추진본부 결성식’을 개최하였고, 12일에는 신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으로 ‘1천만 개헌서명운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5일 민..
한국의 진보적 여성운동과 여성평우회 유영산(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80년대 여성운동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경숙사건’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권신장의 필요성이나 성불평등의 심각성을 사회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80년대를 살았던 동시대인 중에서도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이후 세대들은 더욱 이 사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우리사회에서 이 사건은 잊혀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운동단체 내에서 연대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불평등의 심각성을 이슈화한 계기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가 더욱 컸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바로 여성평우회(이하 여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