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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사료(구술) 이야기

연분홍 코스모스를 노래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29. 15:35
 
‘목사가‘먹사’가 되고 기독교가‘개독교’로 경멸의 대상이 되는, 찌질하고 볼썽사나운 야만의 시대다. 나 자신 예수를‘구원자’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입장에서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나마 지리산 기슭에서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 오체투지의 고행에 나선 분들이 있기에 종교에 대한 믿음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처럼 한국의 개신교가 제 이름값을 못할 때 더욱 그리운 사람이 있다. 문익환 목사님. 그의 이름 석자 뒤엔‘목사’가 붙지만 그는 시인이었고 신학자였으며 빼어난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가 우리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기며 이루었던 운동가로서의 정점은아무래도 북한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과 관련된 사건이 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가 내게로 다가와 영원히 지지 않을 꽃이 된 것은 6월항쟁을 전후한 분신정국에서 숨결이 꺼져가는 젊은이들의 손을 잡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거나, 두루마기를 입고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사자처럼 포효하던 때였다. 그는 광야에 홀로선 제사장이요, 그가 좋아했던 구약시대의 하바꾹과도 같은 예언자였다.
 

그는 독재자의 핍박 속에서 자유를 외쳤으며, 분단의 극점에서 통일을 노래했다. 그는 세상의 어떤 광포한왕 앞에서도 담대했으며, 동시에 들에 핀 이름모를 풀 꽃 앞에서도 옷깃을 여미며 생명에의 한없는 외경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순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발자취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찾는다. 그는 진정 로고스(logos, 말씀 곧 하느님)의 아포스톨로스 ‘(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곧 사도)였다.“ 나는 섬김 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예수의 언표는 그대로 그의 몫이 되어 박정희로 부터 전두환과 노태우에 이르는 어둠의 세력에 의해 이 땅의 가장 낮은자, 가장 소외된 자가 된 이를 찾아 그들을 섬기고 받들었다. 그는 철거민들의 생존권 투쟁의 자리에,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비전향장기수와 함께 했다.
그는 살아서 행복했다.
그가 행복했던 것은 그의 반려인 박용길 장로의 존재 때문이라고 감히 말한다면 그를 폄훼하는 것일 까? 문익환 목사의 아호 ‘늦봄’은 박용길 장로의 ‘봄길’을 만나 비로소 지상에 생명의 꽃을 활짝 피운다. 문익환은 아내 박용길을‘연분홍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연분홍 빛 우주. 얼마나 황홀한 시적 감수성 인가.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전범(典範), 그런 사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던 박용길 장로 또한 분명 행복한 분이었을 것이다.

 
 
지난달 초 박용길 장로가 90세 생신을 맞으셨다. 졸수연(卒壽宴) 때에 그이의 전 생애가 <1919~2008년 봄길 박용길의‘나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영상과 함께 낭독되었다.
“…… 1976년 3?1사건으로 문 목사가 투옥 되자 나 도 구속자 가족이 되어 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우리 구속자 가족들은 옥바라지를 하며 보라색 같은 옷을 입고 구호가 적힌 부채, 우산 등을 들고 시내 곳곳을 다니며 시위를 하고 해외에 국내소식을 알리고 갈릴리 교회, 목요 기도회, 금요 기도회 등에 참석해 고난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들은 구속자 가족협의회, NCC 인권위원회, 기장여신도회 등 여러 단체의 도움을 받았다. 캐나다에 계셨던 부모님은 미주에서 시위와 기도로 지원해 주시고 아들 의근과 성근은 번갈아 법정에 참석해 외워서 기록을 작성, 세상에 알리며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였다.”
사업회에는 박용길 장로 가 지난 2002년도에 기증한 2,500여 건의 사료가 있다. 엄청난 양이다. 그중 엔 위에 인용한 글에도 등장하는 보라색 원피스와 부채, 손수건 등 구속자 석방투쟁 당시 사용했던 박물류도 있다.
시인 김형수는『문익환 평전』에서, “박용길은 폐결핵 청년을 반대하는 친정 부모에게,‘ 6개월만 살더라도 시집을 가겠노라’고 떼를 썼다. 그리고는 여든 살의 나이를 넘길 때까지 문익환 목사가 갔던 모든 길을 뒤따라갔다. 민족사에 바쳐진 이 불멸의 사랑은 남과 북의 인민에게 동시에 존경을 받았다. 분단 50년 동안 단 한 쌍밖에 누리지 못한 축복이었다.”고 상찬한 바 있다.
이들의 삶이 정녕 부럽지 아니한가? 그리고 나의 삶이 조금은 부끄럽지 아니한가?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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