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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사료(구술) 이야기

아름다운 청년과 대학생 친구 하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30. 13:41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절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든 탓인지, 조석으로 스치는 쌀쌀한 바람에도 마음이 핍진하고 서늘하다. 상강(霜降)도 지난 지 오래되었으니 낙과와 추수가 끝난 들판엔 지금쯤 첫서리가 내렸을 터이다. 11월은 동토를 향한 죽음에로 다가서는 계절이다. 그래서 지내온 한 해를 겸허하게 되돌아보는 때이기도 하다.
얼마 전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을 만났다. 오랜만의 해후였다. 그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지난 1980년대 후반 필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유럽지부 일을 잠시 맡은 적이 있어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가끔씩 만났다. 우리는 마침 30대 동갑내기였으며 당시 주변의 어른들과는 달리 말도 잘 통해서 서로를 친근하게 여겼을 것이다. 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동숭동의 학림다방에서 지난날들을 추억하며 현실을 개탄했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어서인지, 아니면 너절한 현실이 한심해서인지 우리는 그래도 그 시절이 한편으론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는 군사독재의 망령이 여전했으며 동구사회주의권의 연이은 붕괴로 어수선하던, 말하자면 세기말의 광풍 한가운데를 살던 시절이었다. 색깔로 표현하자면 온통 잿빛이었지만 언젠가는 먹장구름을 뚫고 한 올 햇살이 비칠 것이라는, ‘대책 없는’ 희망도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늦은 귀가로 피곤한 몸을 눕혀 잠을 재촉했으나 쉬이 잠들지 않는 대신, 어디선가 읽은 소설가 김영현의 자조적인 글귀가 떠올랐다. “모던하고, 댄디하고, 소프트하며,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지적이며, 고상하며, 어떤 코드와도 잘 들어맞고, 시대와 불화하는 척 포즈를 잡지만 사실은 시대와 가장 잘 야합하는, 그들만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이고 곧 내가 아닌가. 그렇다면 질풍노도의 시대를 거치고 치욕스럽게 살아남은 내가, 치열한 삶의 끝을 죽음으로 마감한 자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한 헌사는 “역사를 있는 모습 그대로 파악해서 거기에 필주(筆註)를 가함으로써 있어야할 모습을 살리는 일(사마천)”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각종 진상규명위원회나 내가 머물고 있는 기념사업회의 존재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수심 가운데 뒤척이며 나는 전태일 열사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떠올렸고 그 위에 오버랩되는 조영래 변호사의 촌놈처럼 웃는 모습을 생각했다. 지금 모란공원에 사이좋게 누워있는, 죽어서 영원히 산 자가 된 아름다운 청년과 보석처럼 빛나던 그의 대학생 친구 하나를.청계천에 놓인 버들다리를 건너 평화시장으로 접어드는 들머리. 22살이던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1970년 11월 13일의 일이다. 후일 『조영래 평전』을 쓴 안경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면 “독재는 용납할망정 좌익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질서가 확고하게 정착된” 시절의 일이었다.
싸움질하는 와중에 간간히 법이라는 걸 만드는 곳이 국회이고, 그런 곳에서 태어난 근로기준법이 제 이름만큼의 역할을 하리라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현실인데, 그런 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 또한 현실임을 전태일은 몰랐을까. 법대로 살고 싶은 그 청년은 그러나 ‘법은 법이고 현실은 현실’로 제 각각 따로 노는 세상에서 기계처럼 노동을 팔며 살다가 예수처럼 홀연히 세상을 떴다. 전태일의 마지막 말은 “어머니…… 배가 고파요.”였고 예수의 마지막 말은 “목이 마르다.”였다. 예수를 죽게 한 것이 빌라도가 아닌 탐욕과 위선과 이기로 뭉쳐진 평범한 인간들이었듯이, 전태일을 불살라 죽게 한 것 또한 박정희 만이 아닌 바로 너와 나, 우리였다. 스물 셋의 대학생 조영래는 이미 그 사실을 인식했다.
11월 20일 서울법대에서 열린 전태일 추도식에서 조영래가 초안을 쓴 시국선언문이 낭독되었다. 그는 전태일을 죽인 5대 살인자로 “박정희 정권·기업주·어용노총·지식인·모든 사회인”등을 지목했던 것이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했듯 전태일은 같은 해 11월 27일 청계피복노조의 탄생으로 부활하였고, 70년대 한국 사회운동에 정신적 견인차로, 한국 노동운동의 든든하고 자랑스런 뿌리로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일찍이 장기표는 전태일을 예수에, 조영래를 사도바울에 비유한 바 있지만, 조영래의 삶은 전태일의 죽음과 굳게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전태일의 죽음에서 황홀한 불꽃을 보았고, 참혹한 사랑을 보았으며, 위대한 분노를 보았던 조영래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저자 미상 상태로, 더 정확하게는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의 이름으로 1983년 세상에 내어보냈으며, 그는 이 책을 통해 허명의 시대를 익명으로 버티며 숱한 이들의 가슴에 눈물로 아로새겨진 각오를 불어넣곤 했다.
『전태일 평전』으로 개명된 이 책은 저자가 죽은 후인 1991년에야 비로소 표지에 그 이름을 명토박을 수 있었고, 후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사업의 하나로 전순옥이 번역하여 『A Single Spark』으로 내놓았으며, 얼마 전엔 인도네시아에서 번역되기도 했다.
사료관은 조영래 변호사의 부인이자 동지였던 이옥경 씨가 기증한 사료 206건을 소장하고 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관련된 고발장과 변론요지서, 각종 자필메모와 <창작과 비평> 등에 게재한 글의 자필 원고, 고교 시절의 수업노트, 전태일 동지 추모비문 자필원고(사진 참조) 등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는 정의도 패배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폭력이 정신을 꺾을 수 있음을 그리고 용기가 그에 상응한 보답을 받지 못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가 승리했던 사실로부터 배웠다는 카뮈의 술회가 새삼 가슴을 치는 시절을 살고 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춤을 추는 이 수상한 시대에, 전태일을 기리는 조영래의 아랫 글을 표지석 삼아봄은 어떨지. 이글은 1988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17주기를 맞아 모란공원의 묘소에 건립된 추모비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글씨로 새겨졌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죽음이 있어 여기 한 덩이 돌을 일으켜 세우나니 아! 아! 전태일 우리 민중의 고난의 운명 속에 피로 아로새겨진 불멸의 이름이여(……) 저 스물두 해의 아픈 삶을 결단하여 가진 자들의 야만과 횡포 앞에 온몸으로 부딪혀 간 그의 피어린 발자취가 있었기에 오늘 이 땅에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사는 자주 민주 평화의 새 세상을 쟁취하려는 일천만 노동자와 사천만 민중의 우렁찬 해방의 함성이 있나니 지나가는 길손이여, 이 말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다만 기억하고 또 다짐하라.
불길 속에 휩싸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하던 그 피맺힌 울부짖음을.
 
글·사료 어수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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