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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노을을 뜻 있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3. 2. 10:50

인생의 노을을 뜻 있게

 

 

지난주 많은 국민의 애도 속에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善終)하셨습니다. 추기경보다 한 살 위인 제 선배 한 분은 장례미사 전날 명동 대성당에

마련된 빈소에 다녀 온후 “이 나이에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반성하며 무척 부끄러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끄럽게 생각한

사람이 어찌 이 선배 한 분만이겠습니까.

추기경이라는 가톨릭 성직 최고의 자리에 계셨던 분답게 그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종교지도자로서의 그의 몸가짐을

보통 사람이 다 따라 할 수는 없겠지만, 평소 제가 지극히 감동한 것은 그의 한없이 겸허하고 소탈한 인품이었습니다.

위엄을 유지한다는 것이 겸손이나 소탈하다는 것과 이율배반(二律背反)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추기경님은 당신의 공사생활(公私生活)에서

이 두 가지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조화시켜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그때그때 대처하는 데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습니다.

김 추기경은 젊을 때부터 가난한 자, 약한 자,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서민 속에 머물며 그들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을 소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98년 서울 대교구장의 바쁜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조용히 사시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주는 일에서 큰 기쁨을 찾았다고 합니다.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그 분은 온 민족의 지도자였고 조물주의 한 인간 prototype(원형)이라 부르고 싶은 고귀한 존재였습니다.

역사연구에서 가정법(假定法)을 시도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만, 만일 우리나라 정치에서 김 추기경님과 같이 철저한

겸손을 실천에 옮기는 지도자가 몇 사람만 있었더라도 우리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인생의 만년(晩年)을 지는 해의 노을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이가 많습니다. 어떤 분은 뜨는 해보다 지는 해가 더 아름답다고까지 말합니다만

이는 노년을 미화하고 늙은이에게 위로를 주려는 뜻이겠지요. 이걸 떠오르는 해는 힘차고 장엄한 데가 있지만 한편 저녁노을엔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는 게 더 정직한 표현이겠습니다.

일본사람은 ‘마케오시미’(負け惜しみ)란 말을 잘 씁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군색한 변명을 일컫는 말이지요. “인생에 있어 만년이 더욱

즐겁다”고 강변하면 이런 핀잔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말년을 젊을 때 못지않게 뜻있게 살아보자는 희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이를 더하여 체력이 감퇴하고 여러 신체기능이 둔화하여 마침내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攝理)입니다. 그러나

이 노년기를 어떻게 보람 있게 보내느냐의 문제는 개개인에 달린 과제라 봅니다.

김 추기경은 만 85세 되셨을 때 만드신 영상 회고록에서 당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시며 당신이 성직에 몸 바치기 전과

그 후를 조용히 회상하셨습니다. 그건 종교나 철학에서 말하는 관조(觀照) 바로 그것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이번 주에 85회 생일을 맞았습니다. 저도 추기경님처럼 조물주의 섭리를 순순히 받아들여 인생의 노을을 뜻있게 마감하려고

합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추기경님의 그 겸손한 자세만큼은 꼭 몸에 익히고 싶습니다.

항상 낮은 자세로 세상을 대하고 가족들이나 친지들에게 큰 짐을 주지 않으며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여생을 즐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무엇보다 건강에 무척 주의합니다. 그것이 남을 괴롭히지 않고 자기시간을 즐길 수 있는 최상의 길이란 것을 오래 전

깨닫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랜 옥살이를 치르고 찾아온 김지하 시인에게 김 추기경은 우선 양주 한 잔으로 그를 위로하고, 취재 중인 여기자의 차가운 손에는 당신의

장갑을 벗어주시고 또 그의 70대 운전기사는 30년 일하는 동안 한 번도 빨리 가자고 재촉하시는 추기경님을 못 보았다고 합니다.

가시는 길에서도 ‘사랑한다,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신 그는 평소에 행동으로 이 교훈을 이렇게 쉽게 실천해 보여주셨습니다. 길은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입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 TIME 서울지국 기자

-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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