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함께쓰는 민주주의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머나먼 길 본문

인물/칼럼/인터뷰/칼럼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머나먼 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6. 16:26




1998년 5월 독재와 부패로 얼룩진 수하르또 체제가 극적으로 무너졌다. 수하르또의 뒤를 이어 대통령 직을 승계하였던 수하르또의 측근 하비비도 헌정절차에 따라 퇴진했다. 이어 이슬람 지도자 와히드와 메가와띠가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취임했으니, 민주화는 인도네시아 시민사회가 경제위기를 군사정부에 대한 도전의 계기로 적극 활용한 성과였다.
박정희 독재체제에 비견될 수 있는 수하르또 독재체제는 1965년 ‘9·30 사태’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를 수하르또가 평정하고 수까르노 지지 세력과 인도네시아 공산당세력을 괴멸시킨 가운데 수립되었다. ‘9·30 사태’ 이후 1966년까지 공산주의자로 몰려 살해된 숫자는 아직도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한 인권보고서에 의하면, 이 시기에 정치적 이유로 피살된 사람을 1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집권 초기부터 수하르또의 정치적 지위가 안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카르타-베이징 축을 추진하였던 좌파 성향의 수까르노 정권에 우호적인 정치세력이 군부 내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관료기구 역시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하르또는 자신이 내건 이른바 ‘신질서’ 체제로 이들을 통합해내기 위해 수까르노 시기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신해서 근대화, 개발 등과 같은 다분히 실용적인 기치를 내걸었다.

 

근대화, 개발 등을 내건 수하르또
그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군 지휘구조와 비대한 관료기구를 개혁하였다. ‘신질서’의 안정화를 명분으로 1971년의 관권선거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 선거에서 수하르또에 의해 급조된 골까르(‘직능그룹’이라는 뜻)가 360개 의석 중 236개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 이후에도 집권 골까르는 63~73%의 득표율을 지속적으로 확보하였다. 야당에 해당하는 통일개발당과 인도네시아민주당은 이미 무력화된 상태였다. 군의 이중적 기능(드위 훙시), 즉 국가안보 기능과 정치사회적 기능에 대한 정당화를 토대로 수하르또 군사독재체제는 확고한 기반을 갖게 되었다.
특히 국가주의에 해당하는 빤짜실라(pancasila) 원리를 통해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였고 국가폭력이 정당화되었다. 대중매체와 문헌들도 모두 정부의 감시와 규제 대상이 되었다.
당시 수하르또 군사정부는 200여 종의 서적을 금서로 규정하였다. 주요 일간지들은 자기검열 문화에 익숙해졌고, 일간지 중 일부는 수하르또 가족이나 집권당 골까르와 공식적·비공식적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들어와 수하르또 독재체제는 몇 가지 불안한 상황에 봉착하였다. 우선 석유가격의 급등으로 예기치 않은 수입원을 확보하였던 국고가 무모하게 국가사업 확장을 꾀한 결과 바닥을 드러내면서 재정난에 직면하였다. 무슬림과 학생들의 불만도 고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는 수하르또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였으며, 1978년 3월 2일 수하르또 3선 반대운동은 폭력적으로 저지되었다. 학생시위 보도와 관련하여 4개 신문이 폐간되었으며, 반정부 유인물이 배포된 가쟈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떨어졌다. 나아가 대학 내에서의 정치활동을 규제하려는 의도에서 1978년에 ‘대학정상화법’이 시행되었다.

 

이후 1990년대까지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렇다 할 사회적 도전이 없었다. 이는 강압적으로 사회를 탈 정치화시킨 수하르또의 정치적 성과였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와 학생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수하르또 체제에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30여 년 동안 수하르또 군사정부가 취한 개입과 억압 그리고 포섭은 인도네시아의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독자적 능력을 철저하게 훼손시켰다. 정당들뿐만 아니라 이슬람조직, 조직노동자, NGO 그리고 여타 사회세력들의 자율적 역량이 초토화되었다.

단지 학생들만이 간헐적으로 개혁을 압박하였다.
1997년 태국에서 비롯된 금융위기는 인도네시아도 강타하였다. 국가부도 위기는 그동안 잠복되어 있던 기층사회의 불만을 ‘폭동’으로 표출시켰고 수하르또 군사정부는 위기에 몰렸다. 이미 1996년 6월부터 누적되었던 대중들의 불만은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그 수위가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폭동’은 32년 수하르또 장기독재체제를 마감시켰다.

 

수하르또 독재체제의 붕괴
군사정부가 붕괴되자 국민대중들의 요구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공무원 수당, 노동정책, 최저임금, 도시빈민과 같은 사회경제적 이슈뿐만 아니라 수하르또 재판 등 국가폭력과 관련된 과거청산의 문제도 제기되었다. 독립성을 보장받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과거 인권침해 사례에 관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법무부도 법무인권부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수하르또 체제의 종식이 군부의 정치개입을 정당화하는 ‘이중기능’의 종식은 아니었다. 수하르또 체제의 붕괴 과정에서 이른바 중립적 혹은 반(反) 수하르또 노선을 택했던 군부 엘리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수하르또 시기 국가폭력과 연루된 군 장교에 대한 처벌과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인권단체에 대해서 군부는 협박과 테러로 맞대응하였다.
1998년 5월 수하르또 퇴진 직후 군부 내 개혁파 그룹은 수하르또 신질서 시기에 정당화되었던 군의 ‘이중기능’에 대한 수정을 선언하였다. 이제 군은 자신의 정치적 기능을 축소하고 민주화 과정과 인권신장에 참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 개혁의 골자로서 지배로부터 영향력 행사로, 직접적 영향력 행사에서 간접적 영향력 행사로, 국가 내 다른 부문과의 정치적 역할 분담 등을 공언하였다. 이처럼 인도네시아 군부는 정치개입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정치개입을 택하였다.
한편 민주화 이후, 특히 동티모르 독립 이후 아쩨의 인권상황은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아 동티모르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자카르타 중앙정부는 자치를 외치는 아쩨인들의 목소리에 더욱 과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군부의 후원을 받으며 ‘인도네시아 단일국가주의’ 이념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메가와티 문민정부는 아쩨에서 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되는 불법연행, 납치, 고문, 사살 등과 같은 인권유린을 묵과하였다.



계속되는 아쩨의 비극
독립 직후 ‘하나의 국가’를 추구하고 있던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는 수마트라섬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아쩨에 ‘특별자치권’을 약속하고 그들을 통합해냈다. 그러나 자카르타 중앙정부는 약속을 저버렸다. 1967년 수하르또 신질서체제가 시작되면서 다수종족인 자바족을 제외한 나머지 240여 종족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중앙정부의 ‘자바화’ 정책은 인구 4백만 명에 석유, 가스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고 있는 아쩨지역을 빈곤의 땅으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 하에서 1976년 아쩨해방운동(GAM)이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부터의 분리와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게릴라운동 가담자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지지자들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 1989년 수하르또 군사정부는 아쩨지역을 군사작전지역(DOM)으로 선포하였다.

아쩨인들의 반란은 아쩨지역의 자율성과 개발을 무시하고 단일한 국가성만을 강조해온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리고 수하르또 체제는 석유, 가스, 목재, 여러 광물질 등 인도네시아 국가수입의 11%에 이를 정도였던 아쩨지역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철저히 착취하였다. 천연가스만 보더라도 매년 26억 달러가 재정수입으로 들어갔다. 인도네시아 군의 보호 아래 가스 생산을 하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 액슨모빌도 아쩨인들에게는 제국주의를 상징할 뿐이었다.
개발이 있었지만 영세농민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 없이 이루어졌고 환경파괴를 수반했다. 그리고 통합정책의 일환으로 자바인을 아쩨지역에 무리하게 이주시켰다. 아쩨지역에 새로이 임명되거나 부임하는 관료들은 아쩨인들의 정서를 반영하기보다는 자카르타 중앙정부의 눈치를 보았고 ‘특별자치지역’은 말뿐이었다. 결국 소외와 착취에 대한 아쩨인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시작된 아쩨해방운동(GAM)의 무장투쟁 이후 10만여 명의 아쩨인들이 살해되었다.
수하르또 체제 이후 대중의 정치적 참여가 절정에 이르던 와히드 정부시기에 아쩨인들 역시 희망에 부풀었다. 수하르또 체제 붕괴의 여파로 아쩨인들도 1989년 이래 지속되어 온 군사작전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8년 8월 7일 주도(州都) 반다아쩨를 방문한 당시 대통령 하비비는 아쩨에서 행해진 지나친 군사작전에 대해 공개 사과하였다. 그는 비정규군을 철수시키고 인권유린 연루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1998년 9~12월 사이 인도네시아 군이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아쩨 민주화를 요구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하였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동티모르에서와 같은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하였다. 아쩨지역 학생들은 아쩨주민투표정보센터를 결성하고 폭력적 상황이 가속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민들이 독립, 자치, 연방 중 어느 것을 원하는지를 묻는 주민투표안을 제시하였다.
1999년 11월 8일, 반다아쩨에는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하는 군중이 2백만 명 이상 모였다.

 

수하르또 이후의 정치체제
하비비의 뒤를 이어 명실상부하게 출범한 와히드 정부시기의 이른바 ‘민족화해정부’ 노선은 기존의 자바 중심적 국가주의를 혁신한 것이었다. 와히드는 ‘사회적 대화’라고 표현될 수 있는 공개토론회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적극적 노동정책도 시행하였다. 민-군 관계의 재정립을 위해 동티모르 학살의 책임자로 지목되던 군 장성 출신 위란또에 대한 책임 추궁도 시도하였다. 군과 경찰을 분리시키고 경찰을 대통령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두었다.
그러나 와히드의 정치적 화해노선, 민족화해 노선은 일차적으로 군부의 반발에 직면하였다. 기묘하게도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시도되면서 폭발물 테러 사건이 유난히 증가하였다. 관공서, 쇼핑센터, 성전, 기타 공공장소에서 폭발물 테러가 발생하면서 와히드 정권의 신뢰도가 추락하였다.


 

1999년 동티모르가 독립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한 이후 와히드 정부는 분리주의운동, 특히 아쩨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두고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었다. 온건파는 극도로 중앙집권적인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연방제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수까르노 시기의 단일 국가주의자들을 연상케 하는 메가와띠 부통령과 우익 성향의 군부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결국 와히드는 의회에서 최다 의석을 보유하고 있던 민주투쟁당의 메가와띠와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는 군부에 굴복하고 연방제안을 포기하였다.
그의 연방제안 철회는 인도네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인종, 언어집단, 역사적 배경, 종교,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법 앞에서 동등한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종족사회 공동체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2001년 7월 와히드의 뒤를 이어 메가와띠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녀는 수하르또와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 단일국가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흥미롭게도 주요 도시에서 빈발하였던 폭발물 테러가 현저히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메기와띠 정부는 아쩨인들을 지원하는 인권단체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아쩨에 경찰의 활동이 강화되면서 인권침해와 테러가 급증하였다. 군 병력이 다시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2002년에는 3만 2천 명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군 지역사령부가 반다아쩨에 설치되었다. 아쩨에 엄청난 병력이 주둔하게 되면서 자연히 무고하게 희생되는 주민들의 수가 늘어만 갔다. 비사법적 처형 사례도 증가하였다. 인권유린은 대부분 아쩨해방운동(GAM)을 제거하려는 인도네시아 군의 작전 수행과정에서 저질러졌다.
마침내 2003년 5월 19일 메가와띠는 아쩨 분리주의운동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동티모르 침공 이래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에 들어갔다.

인권단체들은 2004년 4월 총선에 즈음하여 아쩨인들의 인권보장과 자유로운 선거를 위해 계엄령을 철회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메가와띠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다.

군부에 포획된 민주주의
이렇듯 인도네시아에서는 민주화 이행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과거 권위주의세력과 이 세력들에게 포획된 문민정부가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억압하였다. 지난해에 치러진 인도네시아의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군 장성 출신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안보장관이 메가와띠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수하르또 시기와 달리 군의 정치·사회적 기능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앞날은 불안하다. 지진·해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아쩨지역에 대한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로워지면서 중앙정부와 아쩨해방운동(GAM) 사이에 평화회담이 재개되었지만 자카르타 중앙정부는 여전히 고압적이다. 때문에 아쩨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단지 확실한 것은 아쩨에서의 인권지수가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 수준을 가늠하는 대표적인 척도라는 점일 뿐이다.

 



<박은홍>
성공회대 아시아NGO정보센터 부소장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