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함께쓰는 민주주의

막장 본문

인물/칼럼/인터뷰/칼럼

막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2. 27. 10:00

막장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일생을 그린 영화가 몇 편 있습니다. 커크 더글라스(반 고흐)와 앤서니 퀸(폴 고갱)이 등장하는

1956년작 빈센테 미넬리 감독의 ‘삶의 욕망(Lust for life)’, 1990년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빈센트와 테오(Vincent & Theo)’, 자크 뒤트롱이

반 고흐를 연기한 1991년작 모리스 피알라 감독의 ‘반 고흐(Van Gogh)’가 보기 드문 반 고흐에 관한 영화들입니다.


반 고흐가 런던과 파리를 거친 구필 화상의 점원을 그만둔 뒤에 아버지처럼 목사의 길을 걷기 위해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 지역에서 수습

전도사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을 ‘삶의 욕망’은 이렇게 영상화했습니다.


어느 일요일에 반 고흐가 설교를 하고 있을 때에 두크레그라는 광원이 교회에서 큰 발걸음 소리를 내며 나갑니다. 반 고흐는 그의 집에까지

따라가 “왜 도중에 나갔느냐” “‘무엇이 화를 나게 했냐”고 묻습니다.


“나를 도와주시오. 당신들을 이해하고 알 수 있게… 집에 초대도 하고”.(반 고흐)

“이곳은 집이 아니오. 단지 잠만 자는 곳이지. 600미터 지하의 저곳이 우리가 사는 곳이오!”(두크레그)

“데리고 가겠소?”(반 고흐)

“물론 데리고 갈 수 있지요.’ (두크레그)

그렇게 그들은 새벽 4시에 만나 함께 지하 600미터의 ‘막장’으로 내려갑니다. 며칠 뒤 뒤크레그 광원은 갱도가 무너져 다른 여섯 명과 함께

세상을 하직하죠.


전도사위원회에서 반 고흐를 점검하기 위해 나옵니다.

“반 고흐 씨, 이게 무슨 짓이요? 월급은 어디 있고 이런 가난뱅이 생활을 하시오? 이런 침대에서 날짐승처럼 잠을 잔단 말이오? 그러면서

영혼의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어요?” (위원들)

“나보다 더 필요한 아픈 부인께 내줬습니다.”(반 고흐)

“생각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당신의 행동이 교회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어요. 이렇게 하고 다니면 누가 당신을 존경하겠소?

(위원들)

“명예 따윈 신경 안 써요. 그들과 같이 고생해야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지요. 어디서 잔들 어때요? 아이들의 무덤을 보시오. 피와 땀으로

몸을 젖혀 본 후에나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설교를 하시오. 위선자들! 위선자들!”(반 고흐)


반 고흐가 내려간 ‘막장’은 흑향(黑鄕)에서 운명의 굴레를 짊어진 사람들이 세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소중한 곳이었습니다. 반 고흐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사랑은 그림에서도 흑백영화 장면 같은 음울한 빛깔로 칠해져 나타납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나 ‘석탄을 나르는

여인들’ ‘구두’ ‘삽질하는 여인’ 같은.


요즘 필자는 ‘욕하면서 본다’는 소위 ‘막장 드라마’라는 어휘에 접해 반 고흐의 막장을 떠올렸습니다. 시청률을 의식하여 내용이 타락한

드라마를 ‘막장 드라마’라고 비난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막장이 ‘더 갈 곳 없이 타락했다’는 의미로 매도될 때에 실제로 막장에서 석탄을

캐는 광원들의 비애는 어떨까요? 대중매체는 조어(造語)의 천재들이지만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막장’의 사전적인 의미는 ‘갱도(坑道)의 막다른 곳’,. 그러니 최일선 생산거점입니다. 우리 국민들에겐 초여름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 얼굴에

부황 들 정도로 초근목피로 배를 채우며 굶주렸던 ‘보릿고개’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 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구할 수 없었던 1963년

부터 학사를 포함한 8,000여명의 젊은이들이 독일 탄전지대에 광원으로 파송되어 땅속 1,000미터 이하의 ‘막장’에서 석탄을 파헤치며 피땀

흘려 번 돈을 고국에 송금했습니다. 그들의 품삯이 차관의 담보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막장 드라마’라고 마구 써 제끼는 분들은? 그리고 ‘막장 드라마’에 열광(?)하는 국민들은?


탄광 ‘막장’에는 예나 지금이나 진폐증을 넘어 압사까지 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가족을 먹여 살리고 사회에 공헌하는 진실한

‘막장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 드라마는 황당무계한 설정과 타락한 캐릭터로 시청자의 인내심을 실험하는 막다른 골목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아니란 말입니다.

 

 

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 각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의 개량을 지고의 가치로 삼아 보도기사와 칼럼을 써왔다.

그는 동구권의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을 역임했으며 신문사 웹사이트 구축과 운영에서 체득한 뉴미디어 분야에서 일가견이 있다.

저서로는 병인양요 시대를 그린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이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