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민주주의
직립(直立) 인간 김남주 2 본문
직립(直立) 인간 김남주 2
1985년 광주교도소에서 왼쪽부터 김남주 시인(2164), 이수일 선생(2010), 안재구 교수(3405), 정종희 선생(2526)
어느 날 문득, 인류의 머나먼 방계조상이 벌떡 일어설 생각을 하게 된 후로, 직립은 줄곧 인간의 자존을 상징하게 되었다. 인간은 허리를 펴고 꼿꼿이 섬으로써 자신을 네발짐승과 구별했으며, 진리와 완성의 숫자 1의 형상을 닮은 수직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수평의 자연에 도전했다. 끊임없는 저항과 불복종, 도전의식은 인간이 직립의 자존심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직립인간 김남주의 자존심도 바로 이 수직의 당당함에 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무릎 꿇지 않은 자의 당당함, 그것은 처세도 기교도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단숨에 진실로 육박해 들어가고야 마는 정직한 싸움꾼의 정신이었다.
자유 좀 주세요 자유 좀 주세요
강자 앞에 허리 굽히고 애걸복걸하면서
동냥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직립의 인간인 나는
-「자유에 대하여」
직립의 자존심
그의 직립을 가능하게 한 것은 남민전과 광주였다. 1978년 8월 남민전 지하신문 《민중의 소리》 1면에 시를 기고한 김남주는 9월부터 남민전 교양 선전선동부에 편입되어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시는 《민중의 소리》가 되고, 삐라가 되어 곳곳에 살포되었다. 총구 아래 헐떡거리던 그의 ‘양심’은 지하조직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기인’과 ‘물봉선생’의 태를 벗어던지고 서서히 전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엄수가 규율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 분 일 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몸처럼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은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전사 1」
김남주는 ‘강자 앞에 허리 굽히고’ 동냥을 하는 대신 부잣집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조직 자금 확보를 위해 칼을 품은 것이다. 그는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 동료 대원들과 함께 낮에는 야산 등지에서 체력단련을 했고, 밤에는 작전에 필요한 포박 훈련을 하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구자영의 집을 급습하는 이른바 ‘봉화산 작전’을 앞두고 전 대원이 가진 출정식에서 그는 결연히 말했다.
‘혁명의 과정에서 많은 동지들이 죽어갈 것이다. 나 또한 민족해방전사의 일원으로 죽어갈 것이다. 나는 나의 죽음이 민족해방의 위대한 성공에 하나의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 민족해방민주혁명 만세!’(『공안사건기록』, 세계)
그것은 단순한 혁명적 낭만주의만은 아니었다. 인혁당 사형수 8인의 수의로 만든 깃발이 웅변하듯이, 종말을 향해 치닫는 유신의 광포한 몸부림 속에서 남민전 전사들은 매순간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이탈한 동료로 인해 중요한 작전이 무산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김남주는 비장함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형, 형은 죽는 것이 안 무섭소?” 잡히면 바로 죽음이라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나는 늘 담담하기만 한 그를 보면서 물었다. 사실 그는 그런 속에서도 늘 여유가 있었다. 장기를 둘 때도 농담을 잃지 않았다. 그 특유의 미소, 느린 듯한 말소리, “얌마, 작은 것에 욕심을 부리면 그렇게 잡혀먹히는 거여.” 하며 흔연히 “장이야”를 부르던 그, 그가 그렇게 대답하였다. “야, 사람은 누구나 다 죽은 거여야.” 지금 생각하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지만 그때 그 분위기에서는 벼락같은 대답이었다.(이학영, 「『내가 만난 김남주』, 이룸)
1992년 봄 부인 박광숙, 아들 토일과 함께
묶인 몸으로 부르는 아아 광주여
그의 아내 박광숙을 만나러 강화도 집에 갔을 때, 남민전 이야기를 하며 참외를 깎는 그이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끝내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김남주 시인이 그때 잡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이는 별로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심상하게 말했다.
“죽었을 거예요, 광주에서. 싸우다가.”
최근에 방한한 베트남의 게릴라 출신 작가 반레는 ‘1980년대 초, 베트남의 라디오에서 김남주의 시가 흘러나왔다.’고 말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감옥에서 시를 썼다는 ‘한국의 전사시인’을 생각하며 호치민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무렵 김남주는 광주교도소에 있었다. 1979년 10월 4일, 80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60여 일에 이르는 죽음 같은 고문을 막 이겨냈을 즈음, ‘광주에선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던 첫 해 막 서울구치소에서 광주교도소로 이감을 와서였다. 어느 날 밤 수많은 광주항쟁 관련자들이 대거 교도소로 이감을 오기 시작하였다. 그때 감옥에서 광주 항쟁을 맞았던 우리는 빚진 자 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이었다. 죽음의 상무대 영창을 빠져 나와 이감을 온 그들은 대부분 지난날 함께 살았던 선배요 친구요 후배들이었다.(이학영, 「『내가 만난 김남주』, 이룸)
도청에서 장렬히 죽음을 맞은 윤상원은 김남주의 대학 친구였다. 광주 전체가 살육으로 초토화된 사실을 알게 된 김남주는 철창을 붙잡고 밤새 울부짖었다. 남민전이 그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명료한 시각을 주었다면, 광주 학살은 그 세계의 실체를 냉혹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계급적 인식이 참혹한 역사를 만나는 순간, 그의 시는 스스로 몸서리치는 칼이 되었다. 신영복이 느긋하게 ‘나의 대학’이라 불렀던 감옥은 김남주에 이르러서는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묶인 몸을 대신하는 그의 무기는 시였고, 그는 진군의 나팔과도 같은 자신의 시들을 80년대 폭압적 현실의 한복판에 날려 보냈다.
피 말리는 긴장 속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다. 시를 외우고 있다가 면회 온 외부인사나 가족, 출감하는 학생들에게 구술해서 전해주기도 했고, 우유갑을 해체한 뒤 나오는 은박지에 뾰족이 간 못으로 한 자씩 새겨 넣은 시들을 변기 안에 감춰두었다가 몰래 내보내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에게 감화를 받은 교도관이 그 일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모인 시들이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와 같은 시집으로 엮였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전사로서의 일상을 투철하게 실천해 나갔다. 간고한 옥살이를 견디기 위해 꾸준히 체력을 단련하였고, 노래를 가르쳤고, 시를 낭송하였으며, 사형장과 마주한 좁은 운동장을 돌면서 제3세계 혁명가들의 생애와 저항정신을 끊임없이 강론하였다. 긴장을 극한 스트레스가 십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그의 건강은 허물어져 갔지만, 바깥의 싸움과 함께한다는 기쁨으로 그는 행복했다.
가석방으로 출소하기 얼마 전에는 펜과 종이를 허용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옥중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목숨 건 단식투쟁을 벌였다. 당시 007 영화를 연상케 하는 극비작전으로 한겨레에 실린 그의 글은 마음껏 팔다리를 펼 수도 없는 ‘0.7평짜리 방’의 지옥을 생생히 알려 읽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그의 투쟁으로 ‘후배 수인’들은 이후 제한적이나마 집필과 독서의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그 ‘환장할 청춘’을 반납하고 그가 얻은 건 치명적인 병이었다.
1988년 12월 21일, 김남주는 가석방조치로 출소한다. 반백이 된 머리와 덜그덕거리는 이, 진이 빠진 목소리. 10여 년 옥살이가 만들어낸 엄혹한 잔영이었다.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고, 세상은 그만큼 변해 있었으며, 당연히 김남주 또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했다.(정경운, ‘전사는 밤으로 떠도는 별이 되는 것이다. 이름도 없이’)
동백의 죽음
출옥 후, ‘길은 내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안다 이 길의 역사를’ 하고 당당히 선언했던 김남주를 맞은 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난마처럼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그는 변화된 현실에 맞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러나 실타래처럼 얽힌 현실에서 길을 찾는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한 순간도 편히 쉬지 못하고, 계속 전국 여기저기를 떠돌아야 했다. 공개 운동권의 크고 작은 행사는 물론, 하다못해 모금용 일일호프집까지 그를 불러댔고,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도무지 앞일을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는 생활은 감옥보다 더 숨 막히는 현실이었다. 오죽하면 ‘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0.7평짜리 방으로’라고 절규했으랴.
가까운 동지들로부터 상처도 많이 받았다. 문단 한편에선 그의 시의 도식성을 비판했고, 운동권 한편에선 김남주의 시가 유약해졌다고 쑥덕였다. 예민한 사람들은 각종 재야 집회에서 시낭송을 통해 만인의 심금(心琴)을 울렸던 그의 사자후와도 같은 목소리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 나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동화 작가 윤기현은 김남주가 ‘그 나이에 그 고생을 하고 형수님이 마련한 임대 아파트에 사는 것을 죄스러워’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스스로 민중시인, 혁명시인이라는 명망과 기득권에 안주할까 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어쩌면 그 채찍질은 변화된 운동 환경, 희망을 잃고 이전투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을 회고하는 김남주의 아내 박광숙의 목소리도 약간 높아졌다.
(본인도) 힘들어하죠. 그때 우리가 목동 이십 평 임대 아파트에 살았는데, 운동하는 사람들은 김남주가 어떻게 이렇게 잘 살 수 있냐고 그랬어요. 이거 자기 것도 아니고 우리 마누라가 산 거라고 그래도 마찬가지였죠. 통일에 대해 한 마디 하면 주사파는 주사파대로 비판하고, 피디는 피디대로 비판을 하고. 어떤 학생들은 아예 앞에 대놓고 말하더라구요, 실망했다고.
감옥에서 편지봉투에 쓴 시 '돈만 있으면', '첫눈'
1991년에 발간한 시집 『사상의 거처』의 후기에서 그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당시의 외롭고 황량한 심경을 털어놓고 있다.
내일 모레 시집이 나올 모양인데 할말도 생각나지 않고 어떤 감회도 떠오르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하고 눈을 감고 그 까닭을 헤아려보지만 실마리 하나 잡히지 않는다. 지난 3년 동안의 내 삶이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헝클어진 실꾸러미처럼 어지러울 뿐이다. 사실 나는 최근 3년 동안 담 밖의 현실에서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쓴 시가 내 마음에 들 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가슴에 닿을 턱이 없다. 생활이 있어야겠다. 생활의 중요한 구성인자인 노동과 투쟁이 있어야겠다. 노동과 투쟁이야말로 콸콸 흐르던 시의 샘이 아니었던가!
노동과 대지에 뿌리를 내린 시인
노동과 투쟁이 어우러진 생활을 되찾기 위해 그는 목동에서 가까운 강화도에 손바닥만한 땅뙈기를 마련했다. 어쩌다 시간이 나면 아내와 함께 도시락을 싸들고 그 땅을 찾았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밭을 갈아엎고 씨를 뿌릴 때 그는 ‘노동의 대지에 뿌리를 내’린 시인처럼 마냥 행복해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가 노동과 투쟁의 생활로 들어갈 만한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췌장암 3기 진단을 받았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이정표를 잃은 사람들은 덧없이 표류하고, 그 많던 강연 요청이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딱 끊겨버린 어느 날이었다.
‘제발 참지만 말고 비명이라도 좀 질러요!’ 하고 절규하는 아내 앞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부랄을 돌멩이로 깨뜨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말기암의 고통과 싸우던 김남주는 1994년 2월 14일 마침내 이승의 옷을 벗었다. 사랑하는 동지에게 ‘개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개같이 헐떡거리며 살다 죽는다.’는 마지막 말을 남겨둔 채.
직립 인간 김남주. 한 시대를 대표하는 투사로, 뛰어난 시인으로, 오랜 세월을 독방에서 보낸 고독한 자연인 김남주는 길지 않은 생애를 직립의 자존심으로 꽉 채워 낸 보기 드문 ‘인간’이었다. 일찍이 김남주의 순정한 삶에 어린 독기를 알아봤던 황석영은 그의 삶과 죽음을 일러 남도의 동백과 같다 했다. 동백처럼 ‘깨끗하게 목이 딱 꺾여 온전한 꽃 한 송이째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자고나면 또 하나의 죽음을 맞아야 하는 이 무서운 땅, 사과를 던지면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이 세상에서 김남주가 그리운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지금도 저 깊은 무덤 흙더미 속에서 시퍼렇게 눈을 뜨고 그가 서 있는 꿈을 꾼다. 그는 지금도 서 있다. 역사의 한복판에.
글_김 기 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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