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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관객과 나누는 설레임과 긴장감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 _ 배우 서이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4. 12. 13:41

"관객과 나누는 설레임긴장감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  - 배우 서이숙

 

글 김미영 kimmy@hani.co.kr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이 말은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연극 <엄마를 부탁해>에서 맏딸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배우 서이숙을 두고 나온 말이 아닐까?
물론 대학로에는 “물이 올랐다”고 표현될 정도로, 연기파 배우로 자리 잡은 30~40대 배우들이 많다.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서주희, 지금은 영화배우로도 활약 중인 <너무 놀라지 마라>의 장영남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독보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바로 서이숙(43)이다. 드라마나 영화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지 않아 대중들에겐 좀 생소한 이름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는 대학로에서만큼은 섭외 1순위의 국민배우다. 지난해 <고곤의 선물> <템페스트> <갈매기> <철종 13년의 세익스피어> <피카소의 여인들> <리어왕>을 비롯 마당놀이 <이춘풍 난봉기>까지 8편의 연극에 출연할 정도로 가장 바쁘게 활동했던 배우 중의 한 명이었다.
현재 그가 출연중인 연극 <엄마를 부탁해>는 지난해 최단 기간 100만부 판매를 돌파하며 한국 사회에 ‘엄마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던 신경숙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3월 23일까지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오른다. 정작 그는 “너무 자주 무대에 올라 관객이 싫증내거나 전작의 모습을 발견할까 두렵다”고 했지만, 그의 연기에 대한 관객과 평단의 반응은 뜨겁다. “서이숙의 절제된 연기 덕분에 연극이 신파로 흐르지 않고, 중심을 잡고 극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는 “과분할 따름”이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가 이 같은 내공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지난 20여 년 간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대 초보 시절, 주인공이 아닐 때는 막연히 코러스를 열심히 하면 됐어요. 30대 때는 주인공이나 선배들의 연기를 집중해서 보고 따라 배우면 됐지요. 40대쯤 되니, 자기가 맡은 배역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겼어요. 제가 맡은 역할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할 위치가 되다보니, 작품 속 인물이나 배경과 관련된 책, 잡지, 자료 등을 탐독하는 것은 기본이 되었습니다.”

이번 작품에 출연하면서는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비롯해 신경숙 씨의 소설을 모두 탐독했다. 2007년 <열하일기만보>에 출연할 당시에는 연암 박지원의 생애를 다룬 서적과 <열하일기> 등을 모두 챙겨 읽었다. 그는 “문자가 주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는데, 책을 읽으면 뜬구름 잡는 것 같던 대사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며 “인물에 대한 공허감도 줄어들어 배역의 특징들을 명확하게 그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뒤늦게 중앙대 국악대학 음악극과에 입학해 만학도가 된 것도 연기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픈 욕구 때문이었다.

고교 졸업 뒤 연극 무대 진출
그의 연기 경력은 어느덧 20년을 훌쩍 넘어섰다. 올해 나이 마흔셋, 인생의 절반을 연극과 함께 동고동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지나보니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관객들이 나만 쳐다보는 줄 알고, 코러스하면서 한 장면이라도 더 잘 나오려고 애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죠.(웃음) 그런데 요즘은 너무 자주 무대에 나와서 관객들이 지겨워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를 지금껏 버티게 했던 힘을 꼽으라면, 단연 연극에 대한 ‘열정’과 연기에 대한 ‘갈망’이었다. 서이숙은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우다. 되레 변신을 꿈꾼다. 수십 편의 연극에 출연하는 지금껏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일을 즐기고, 최선을 다한 결과 지금의 위치에까지 올 수 있었다. 그는 “작품을 할 때마다 전작의 모습이 나올까봐 늘 두렵고 완벽한 인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면서도 “그 설레임과 긴장감, 관객과 나누는 흥분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연극배우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렸을 적부터 작정하고 배우가 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배드민턴 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고교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수원에서 사회체육 코치로 사회에 첫 발을 디뎠다. 의외다. 그의 인생을 바꾼 건, 우연히 수원예술극장에서 본 연극 <신의 아그네스>였다.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없었던 경기도 연천 출신의 시골소녀에게 연극은 충격 그 자체였어요. 학창시절 연극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했지만, 콩트를 만들어 발표하고 국극단원을 따라다녔던 것이 바로 그런 끼를 주체하지 못해서였나 봅니다.”

운이 좋게도, 그 즈음 수원예술극장 단원 모집 공고가 났다. 갓 스무살, 뭘 해야 할지 막막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주저함 없이 오디션을 봤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아 스스로 알아서 살아내야만 했어요. 당연히 저는 여느 직장들처럼 월급을 주는 줄 알았죠. 월급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골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끔찍했어요. 학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월급은 못 받았지만 내 몸 하나 투자하면 되는 곳이어서 ‘아, 무대에서 연극하는 게 저런 것이구나’ 하며 기꺼이 버텼죠.”

운도 따랐다. 갓 입단한 그에게, 연출가는 ‘화술이 좋다’며 곧바로 역할을 맡겼다. 신인배우에게 파격적인 대우가 아닐 수 없다. 낮에는 2편의 아동극, 밤에는 2편의 성인극 무대에 오르고, 짬짬히 포스터를 붙이고 전단을 나눠줘야 하는 고된 일상이었지만 모든 것이 즐거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대에 섰는데, 그때의 경험이 저한테는 너무 좋았고 모든 것이 즐거웠어요.”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다보니, 잡생각 없이 ‘연극’ ‘연기’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3년을 지방 극단에서 내공을 쌓았다. 전국연극제에서 연기상을 받은 것도 이 즈음이다. 그만큼 연극에 대한 열정과 꿈도 커져만 갔다.

1989년 극단 미추 입단, 21년째 한우물
연극의 본거지인 ‘대학로’에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도 극단 ‘미추’가 그를 단원으로 선택했다. 미추는 그의 마음의 고향이자, 지금의 서이숙을 있게 한 귀중한 존재다. 그의 20~30대 청춘을 논할 때 ‘미추’를 빼놓고는 얘기를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미추에서의 기억이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다. 미추에 입단한 뒤, 그의 존재를 널리 알린 <허삼관 매혈기>(2003)에서 허옥란 역을 맡기 전까지 15년 동안 내내 코러스로만 무대에 올랐다. 오랜 세월 동안 무명 단역배우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그가 주인공을 맡은 건 불과 7년 전이다. 정승호, 이희도, 심지어 1년 후배인 손현주, 이원종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추를 떠났다. 그럼에도 그는 남았다. 그가 묵묵하게 연극판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밝고 낙천적인 그의 천성이다.


“코러스를 하는 것조차도 저는 흥미로웠어요. 주변 사람들이 왜 힘들게 남느냐고 했을 때도, 전 힘든 줄을 몰랐거든요. 그냥 어떤 것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으니까요. 아마 다른 것을 경험하지 않아서, 무지에서 오는 행복감 아니었을까도 싶고,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기다린 결과가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다른 여배우들처럼 뭔가를 빨리 이루고 싶어 안달했다면 그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지금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또한 항상 ‘우리 딸이 최고!’라며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 용기를 준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끝이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흔들리고 불안감이 엄습해올 때마다 어머니는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했다.

어쨌든, <허삼관 매혈기>는 그의 배우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되어준 작품이다. 첫 주인공을 맡은 작품인데다, 그녀에게 동아연극상 연기상과 히서연극상 신인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히서연극상 신인상을 받을 때는 마치 제가 대상을 받은 것처럼 펑펑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연극 외에 드라마, 영화 진출 꿈꿔
그의 인생에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될 작품은 아무래도 현재 명성황후로 출연 중인 드라마 <제중원>이 될 것 같다. 비중은 크지 않지만 연극이 아닌 다른 장르에 도전한 첫 작품이다. 그는 다른 연극배우들과 달리 지금껏 드라마나 영화로 외도한 경험이 전무하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덜한 것도 아니고, 뛰어난 연기파 배우로 꼽히는 그가 유독 활동의 폭이 좁았던 이유는 뭘까. 그는 “스스로 ‘배우는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라는 선입견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며 “평생 연기를 하겠다는 생각이 확고했기에, 여유를 부린 탓도 없지 않다”며 웃었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활동의 폭을 넓힐 생각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 ‘초심’을 잃지 않게 해주는 일종의 자극제의 역할을 드라마와 영화가 해주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생소한 장르이다 보니, 더 긴장하게 되요. 배우들의 시선이나 움직임, 대사톤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더 챙겨보게 되고요. 선배들한테 꼬치꼬치 물어보기도 하고요. 처음 연극할 때의 기분을 느낀다고 할까요? 다양한 인물로의 변신이 흥미롭기도 하고요.”

이창동 감독의 새 작품을 비롯해 영화 오디션만 최근 2번을 봤다. “오디션 경험이 워낙 없다보니, 100% 제 색깔과 개성을 어필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어떠한 배역이든, 비중과 상관없이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해보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마음이다.

연애와 결혼, 아이 엄마가 되고픈 희망
그가 요즘 최선을 다해보고 싶은 것이 또 하나 있다. 여느 여성들처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다. 연극에 흠뻑 빠져, 딴 생각을 안 하고 지내다 보니 어느새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겼다.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굉장히 씁쓸해진다고 한다. 솔직히 젊었을 때는 작품과 배역 외에 신경 쓰는 것이 귀찮았다. 이제 와서 그나마 연애와 결혼에 관심을 가져볼까 하니,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빠졌다.
“배우들이 그래서 혼자 사는 경우가 많은가 봐요. 독신주의자는 사실 아니에요. 고민도 하고, 친구 같은 남자를 만나 연애도 해보고 싶죠. 아직 연인을 못 만났나 싶기도 해요. 어딘가에서 제 짝도 저처럼 잘 살고 있겠죠?”

 

글 김미영 | <한겨레> 기자
사진 |
신시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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