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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편지 - 명사십리에서의 유혹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3. 11:37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지요. 한뎃바람은 입안 얼얼하지만 가슴은 활활 타 눈물 쏙 빼놓는 매운 겨자 맛으로 불어 닥쳐야 합니다. 완두콩만한 눈발 또한 드세게 날리어 옷깃 단단히 여미게 해야 참으로 겨울다운 맛이 나게 됩니다.
그해 눈 많아야 이듬해에 풍년 든다 하지 않습니까? 가을걷이 끝낸 거친 논밭에 여직 남아, 다음 해에 심을 알알의 곡식과 민낯 같은 푸성귀 갉아댈 해충도 덮어버려, 탱탱히 얼게 하지요. 그런 겨울에 만나는 겨울 바다는 속살마저 뜨겁게 덥힐 것입니다.
명사십리(鳴沙十里)라 불리는 넓은 모래밭이 완도의 신지도(薪智島)에 있습니다.

 

어우러짐의 미학, 명사십리
여름철이면 북새통을 이루는 해수욕장이지요. 북녘, 함남 원산시 갈마반도의 남동쪽 바닷가에 특히 해당화 많이 피어 있다는 같은 지명의 유명한 명사십리(明沙十里)는 가보질 못해 모르겠으되, 신지도의 명사십리보다 더 고운 모래와 풍취를 지닌 곳으로 알려진 터, 이곳의 아름다움에 견주어 보건대 북녘의 그곳은 모래밭과 숲의 어우러짐이 한껏 뽐낼 만한 곳이리라, 그려봅니다.
십여 리나 됨직한 모래밭의 이쪽 끝에 서면, 저쪽이 아득합니다. 파도가 한가로이 넘실대는 모래밭을 거닐다 보면, 이름 그대로 명징한 소리와 비릿한 바다 내음으로 가슴은 싱싱하게 요동치는 물고기처럼 뛰는 걸 느끼게 됩니다. 이런 모래밭에 아침과 저녁 무렵, 가끔 산책하러 나갑니다.

모래밭 풍경
지난 가을의 모래밭은 좀 너더분했습니다. 북적댔던 여름철의 찌꺼기들과 초가을부터 가을걷이 전까지 억세게 불어댄 태풍으로, 으깨어진 부표나 부서진 통발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지요. 그처럼 난분분하던 모래밭의 쓰레기가 치워진 지금, 그런 대로 깨끗해 보입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태풍은 해 못지않게 득을 주기도 한답니다. 가을걷이 앞둔 곡식을 땅바닥에 드러눕히고 비바람이 쏟아놓는 할큄으로 마음마저 상흔 돋게 해, 육지 사람들에게 태풍은 고약한 것이지만 여기 모래밭 주위로는 그렇지만도 않은 듯합니다.


드센 바람 불고 간 다음 날 새벽이면 모래밭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손에는 비닐봉지나 피피마대, 크나큰 함지박을 들고 있습니다. 태풍에 떠밀려온 피조개와 대합 등속을 줍기 위해서지요. 돌에 부딪혀 표피가 깨진 것들은 그것대로 줍지만, 아픈 생채기 나지 않은 산 것 잡는 재미를 톡톡히 보는 것이지요.
표피에 아픔 지니지 않은 피조개는 모래밭까지 밀려와서라도 살겠다고 제 몸을 모래밭 속에 부리나케 숨깁니다. 몸을 숨기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희한함을 느낍니다.


아주 엄정히 닫은 갑각의 표피 흔들어 모래를 팝니다. 좌우로 몸 흔들어대는 몸짓이 가히 필사적입니다. 서서히 그러나 녀석의 동작으로는 안단테의 빠르기로 모래밭 속으로 제 몸을 감춥니다.
녀석은 안심하게 들앉았음을 기뻐하면서 어서 밀물 오기를 마냥 기다릴 것입니다. 겨우 한숨 돌리며 상념에 젖겠지요.
세상살이라는 게 늘 버겁기만 한 건 아니라며 경험해 봄직한 바, 인간 세상 들여다보니 너희들도 별반 자랑할 만한 위인들은 못되는 듯하다고 구시렁대면서 안도의 긴 숨을 내쉴 무렵, 거침없는 침입자에게 제 몸이 붙들리는 걸 겪는 녀석의 ‘억’ 하는 비명을 이명처럼 듣게 되지요.


흔적 때문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제 몸을 비비작대며 파고든 모래 흔적이 편편한 주위보다 역연한 까닭입니다. 제 몸 꽁꽁 숨기고 들어앉았으나 ‘아나, 콩이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영락없이 잡혀 아침 식탁에 오르게 됩니다. 술안주로 씹히게 되는 것이지요.
저도 마을 사람들 하는 양을 따라 휘번득이며 모래밭 훑다, 한꺼번에 네 개나 주운 적이 있습니다.

 

 

00아보고자퍼죽껏다씨펄
명사십리에서 건진 또 하나의 흐뭇한 풍경을 되새김해 봅니다.
입동(立冬)을 며칠 남겨 놓지 않은 지난 해 11월 초순, 동료들과 함께 모래밭에 나갔었을 때였습니다. 완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상황봉의 단풍 보러 올랐다가, 저녁식사 하러 명사십리 모래밭 한쪽 끝자락에 있는 음식점에 들른 참이었습니다.
음식 나오기 전, 뉘엿뉘엿 노을이 지는 바닷가. 파도 밀려오는 모래밭 끝으로 잠시 내려서서 저 멀리 화물선 점점으로 떠가는 모습을 건네 보고 있는데, 제 옆 저 만치에 서 있던 동료가 어디선가 주워온 막대기를 들고 모래밭에다 무어라 자그맣게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우는 것이었습니다. 슬쩍 눈길 돌려 봤습니다.

“00아보고자퍼죽껏다씨펄”

 

가을 바닷가에 나오게 되어 제가 동료들에게 보여주려 복사해 간 정 양 시인의 <토막말>이라는 제목의 시(詩), 한 대목이었습니다. 미리 나눠준 유인물의 싯귀 가운데에서 글자 크기를 달리한 그 부분이 자신의 감춰진 마음과 딱 맞았던 모양입니다. 저에게 속내를 들킨 동료는 그렇지 않아도 자그마한 글씨를 후다닥 지우고는 얼굴에 노을빛 띠며 황망히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시는 이렇습니다.


토막말

정 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뎐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에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가을 바다는 쓸쓸함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동료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적나라한 속내를 햇살마저 함지로 막 기우는 해름녁의 섬에서 참으로 막말로, 그렇듯 내보인 것이었습니다. 그게 어디 얼굴 빨개져야 하는 마음입니까?
철 지난 겨울 바다는 이렇듯 외롭고 쓸쓸함으로 다가오질 않습니다. 겨울을 겨울답게 하는 드센 바람 휑뎅그러이 불어대는 겨울 바다지만, 지난여름과 가을을 기억할 수 있는 고즈넉한 풍광을 거느리고 있어 아, 춥지 않습니다. 잔잔히 속내 덥혀오는 음악 또한 귓전에 맴돕니다.

 

겨울 바다는 쓸쓸하지 않다
많이 알려진 일본 작곡가 유이치 와타나베(Yuichi Watanabe)의 ‘Last Kiss’가 옷깃 여민 가슴 안으로 흘러들어 옵니다. 이 곡에 대한 그의 설명처럼 ‘넓은 바다가 보이는 해변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설레는 마음을 표현했다’는 현악기로 드러내는 팝적인 멜로디를 떠올리며 사랑 고백하는 심중으로 제 자신을 데웁니다.
저 상황봉 너머로 기우는 햇살의 너울, 노을 지는 겨울 바닷가에서 차가운 한뎃바람 맞으며 절절한 가슴, 끓어오르는 뜨거움으로 사랑 그 사랑 고백할 수 있으리니…… 사랑하는 이여, 여기,겨울 바다에 오시지 않으렵니까!


* 명사십리(鳴沙十里)
조선 후기 철종의 사촌 아우였던 이세보가 안동 김씨의 계략에 의해 신지도 송곡리로 유배를 오게 되었는데, 밤이면 해변에 나가 북녘 하늘을 보며 유배의 피 맺힌 설움과 울분을 시로 읊곤 하였다. 수 년 동안 매일같이 손톱이 닳도록 통한과 울분을 모래톱에 시로 적던 이세보가 귀향살이가 풀려 한양으로 돌아간 뒤부터 이곳 모래밭에 비바람이 치는 날이면 우~웅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흡사 대장부의 울음소리 같다 하여 명사십리(鳴沙十里)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세보가 이곳에서 읊었다는 77수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사진 황석선

글 한상준(소설가)
1955년 전북 고창 출생
1994년 <삶, 사회 그리고 문학>지에 "해리댁의 忘祭"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작품집으로 <오래된 잉태>가 있음
교육문예창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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