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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원풍노조 자녀모임이야기] ‘꿈을 이어가는 사람들’ 본문

민주화운동이야기/민주화운동이야기(노동운동사)

[노동운동-원풍노조 자녀모임이야기] ‘꿈을 이어가는 사람들’

기념사업회 2012. 2. 15. 15:33

* “민주화운동이야기”는 민주화운동/노동운동은 우리시대 개개인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그때의 어느 선택이, 또 그 이후의 어떤 선택이, 삶을 어떻게 달라지게 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것이‘과거’세대의 이야기라면, 그날들 꿈꾸었던‘미래’인 자녀들은‘현재’어떤 모습으로 또 다른 미래를 꿈꾸며 이루어가는지를 연결해보는 장으로 꾸미려합니다. 그 첫 번째는 마침 원풍노조의 자녀들이 모임을 시작했기에 여는 마당의 의미로 시작합니다. 다음호부터는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를 꾸밀 예정입니다.


‘꿈을 이어가는 사람들’

 

-원풍노조 자녀모임이야기 -

장남수


“엄마가 노동조합활동을 했고 해고당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경찰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울부짖는 모습은 상상도 못했어요, 지금 내 나이때에 엄마가 저랬다니..”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영상물속에서 엄마는 지금 스무살의 내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와는 달리 경찰차에 실려지고 있었다. 저게 우리엄마라고? 충격이었다.

강원도 인제 만해마을에 서른한명의 청년들과 여섯명의 어른들이 모였다. 이곳은 식민지가 된 민족현실에 저항했던 한용운선생의 얼이 깃든 곳이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의 배반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은거했던 백담사가 지척에 있는 곳이다. 불의와 정의의 상징이 공존하는 그곳에서 70년대 ‘공순이’들의 자녀들이 모였다.
서른 한명이었다. 대학입학을 앞둔 새내기, 군입대를 3개월가량 남겨 둔 학생, 인터넷신문의 기자로 일하는 청년, 사회복지기관에서 일하는 친구, 스포츠강사인 친구.. 직업도 다양하고 생긴 모습들도, 성격도 다양했다.
이들은 “엄마에게 등 떠밀려서”, 또는 “엄마의 젊은날이 궁금”하기도 하고,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기도 해서” 주말의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이중 몇 명은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 원풍노조의 행사 때 참석한 적이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초면이었다. 생면부지의 청춘들이 버스 안에서 옆자리의 청춘과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소개해주며 신상을 터득한 후 엄마들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간 엄마는 해마다 구월이면 친정가는 표정으로 원풍모임에 갔다. 그러더니 어느 날 ‘민주화운동명예회복인증서’라는 것도 배달되어 왔고 피해보상소송도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부당’하게 해고되었다는 이야기는 귓전으로 들었지만 그 상황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엄마가 머리띠를 두르고 경찰차 안에서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저런 ‘투쟁’을 했다고? 저 어린 여성들이 우리 엄마라고?
영상물 안에서는 여러 어른들이 증언을 하고 있었다.
원풍노조는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고, 원풍노동자들을 기억하는 게 자랑스럽다고.
원풍노조원들이 엄혹한 ‘광주민주화운동’때 모금을 해서 광주희생자들을 위한 거금의 성금을 보냈고 희생자들에게 쓰였다며 울컥 눈물을 쏟는 분도 있었다.

그 사람들 속에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김근태 전의원의 얼굴도 보였다. 그런 분들이 ‘원풍노동자’들을 ‘자랑’하고 ‘감사’하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노동자’였지만 영상물 안에서 엄마의 스무살은 절규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지금 자신의 나이 만큼이거나, 그보다 더 어린 날의 엄마들이 부른 노래를 오십이 넘은 네 명의 ‘엄마’들이 들려주었다.

 

우리부모 병들어 누우신지 삼년에

뒷산에 약초뿌리 모두 캐어 드렸지

나 떠나면 누가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영상물을 보고, 엄마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녀들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한 친구는, 용돈을 적게 준다고 투정부렸는데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또 다른 친구는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한 친구는 좀 길게 어느 날의 기억을 되살렸다.

“어느 날 미역국을 먹는데 엄마가 참기름 병을 가져와서 몇 방울 떨어뜨렸어요. 이렇게 먹으면 맛있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 했더니 감옥에서는 이렇게 해서 먹어,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어요. 뭐, 감옥? 놀라는 저에게 엄마는 태연히 지난이야기를 줄줄 풀어놓으셨어요. 그러다보니 중학교 1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유신헌법’이야기가 나왔는데 ‘유신’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애가 저 혼자 뿐이더라고요. 그렇게 자랐어요. 저는.”

모두가 젊은 날의 엄마를 바라보며 회상에 젖어 있는 동안 이미 오래 전 엄마가 세상을 떠나버려 더 먹먹한 친구도 있었다. 원풍노조의 걸출한 활동가였던 이옥순 총무의 딸 다정이..
스물 한 살 다정이는 11년 전의 엄마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영상 안에서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커트머리를 한 이옥순 총무가 지나갔지만 다정이가 엄마를 알아보았을까.

엄마들의 ‘민주노동’을 돌아본 후 이들은 토론을 시작했다. 토론은 시종 진지했고 따뜻했다.
수십 년을 가족처럼 지내온 엄마들을 둔 공감으로 온기가 흘렀다. 마치 명절날 모인 사촌들처럼 호호, 깔깔, 웃음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그 중 나이가 많은 축인 서른 한 살의 친구가 대표로 마이크를 잡았다.

“어머니들 세대는 원풍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우리는 원풍조합원으로 모일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가족 같은 관계로 만날 수 있는 곳이 없을 터이니 지속적으로 만나면 좋겠다고 합의했습니다. 등산을 가자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산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뒤풀이에만 올 가능성이 있다, 그럼 나눔 모임으로 하자, 맛집 기행으로 하자, 재능기부로 하자, 재능을 좀 더 키워서 하자, 까페를 운영하자, 여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결론은, 오늘만 만나고 헤어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 딸들은 거침이 없었고 싱싱한 열정이 넘쳤다.
밤을 꼬박 새워 이야기하고 게임을 하며 놀더니 어느새 친구, 누나, 언니, 형, 오빠... 가족이 되어있었다.

국가권력에 의해 원풍노조가 깨진지 올해 꼭 30년이다. 해마다 9월27일, ‘그날이 오면’ 전국 각지에서 첫사랑 만나는 듯 설렘을 안고 ‘원풍모임’을 해왔다. 20년 전만 해도 좁은 틈에서 몸을 돌려 아기 젖을 물리는 엄마가 있었고 십 여 명의 꼬맹이들이 졸졸 따라와서 엄마들 중 한 두 명은 즉석놀이방을 꾸려야했다.
그 꼬맹이들이 청년이 되어 우리 앞에 서 있다.
들의 행복한 오늘을 꿈꾸며 처절한 젊은 날을 보낸 엄마들 앞에서 이들은 지금 행복한가.
티 없이 해맑아 보이는 젊음들을 지금 우리시대는 잘 보듬고 있는가.
들은 말했다.
직장은 치열한 눈치와 경쟁이고, 취업은 불안하고, 등록금고지서를 받아 든 엄마얼굴을 대하는 게 바늘방석이고, 학과는 성적에 맞춰 선택한 것일 뿐이고..그래서 관계들도 늘 경쟁이라 이해관계가 개입되는데 여기는 그게 아니어서 너무 편하다고, 이런 모임은 다른 어디에도 없다고..
그렇게 우리 아들 딸들은 또 다른 형태로 힘겹게 서 있었다.
스무살 시절의 우리만큼 이들도 고단했다. 객지를 헤매던 몸이 고향을 찾은 듯 이들은 밤을 꼬박 새워 피로를 풀어놓았다.


다음날 아침, 북어국으로 해장을 하고 백담사로 향했다.
 
“백담사 길입니다, 백담사 하면 무엇이 생각나나요?” 라고 하자 청년들의 입에서는 “전두환!”이 먼저 튀어나왔다.
길이 얼어 4월까지 차량출입이 통제된 7킬로미터의 길을 걸어 백담사입구에 도착하니 하얗게 눈 덮인 계곡에 조각 공원처럼 즐비한 돌탑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무엇을 저리도 켜켜이 기원했을까. 우리는 무엇을 또 소망해야할까.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어떤 길을 만들어 가야할까. 얼음 위 돌밭을 헤집어 어쩌면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할 소망 하나 가만히 보태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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