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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유린의 대표적 현장, 남산 옛 안기부 터를 찾아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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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유린의 대표적 현장, 남산 옛 안기부 터를 찾아서

기념사업회 2003. 10. 9. 13:07
인권유린의 대표적 현장,
남산 옛 안기부 터를 찾아서


은어가 많은 시대는 불행한 시대다. 불행하다는 건 행복하지 않다기보다는 견디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현대사를 되짚어보면 특히 70, 80년대에 많은 은어가 만들어졌다. ‘남산’ 역시 그 시대에 만들어진 은어 가운데 하나다.
반대로 은어를 보면 그 시대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은어란 특정한 계급 혹은 계층 사이에 통용되는 말이다. 말하자면 은어의 대상은 정작 그 은어를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국가안전기획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직장을 가리켜 ‘회사’라는 은어를 사용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곳을 가리켜 회사라고 하지 않았다. 남산이라고 불렀다. 그 시대 정보기관과 일반 국민들 사이는 회사와 남산의 차이만큼 먼 거리였다. 이렇듯 은어의 차이를 통해 우리는 그 시대 정보기관과 국민들이 서로 얼굴을 맞댄 것이 아니라 등을 맞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옛 안기부 본관이 유스호스텔로?
남산 시민 공원은 한가로웠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유모차를 밀고 조심스럽게 비탈진 길을 오르는 어머니의 머리꼭지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벼운 바람에 이파리가 흔들거리며 햇빛을 되쏘고 있어 마치 남산은 거대한 푸른 호수와 같았다. 옛 안기부 본관 건물로 이르는 길 주변 나무그늘에는 점심을 마친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왼편 아래쪽, 남산 1호 터널로 통하는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의 소리도 푸른 숲에 빨려들어 사라졌고, 그 정적에 온 몸을 곤히 뉘고 낮잠을 즐기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숲을 통과하면서 한풀 꺾이는데 그치지 않고 되레 소슬하고 청량한 기운으로 바뀌어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1972년 남산 사무소를 설치한 이래 1995년 안기부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무색하리만큼 평온한 풍경이었다. 지금은 서울종합방재센터로 바뀐 옛 안기부 본관 건물 앞 광장에서는 직원들이 웃통을 벗고 족구를 즐기고 있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남산이라고 하면 괜스레 꺼려지곤 했으니까요. 처음 이곳에 부임해 왔을 때는 지하로 들어갈 때마다 섬뜩한 느낌을 받곤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본관 건물 앞 광장 밑에는 또 하나의 공간이 있다. 왼쪽 입구와 본관 건물은 연결돼 있다.

본관 건물 지하는 현재 서울종합방재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안내를 해 준 방재센터 직원에게 옛 안기부 건물에서 근무하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처럼 그곳에서는 예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본관 건물 지하로 들어가니 미로와 같은 길이 이어졌다. 거리를 가늠해보니 이곳은 건물 지하가 아니라 건물 앞 광장 지하였다. 한마디로 요새였다. 서울에서 119에 전화를 하면 가장 먼저 이곳 방재센터 종합상황실로 연결된다. 그러면 이곳에서는 신고 된 지역 관할 소방서 등에 지령을 내린다. 예전에는 전화국에서 맡았던 일을 이제 통합해서 처리하는 것이다.
“저희 방재센터가 입주하면서 건물의 리모델링은 했지만 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 지하 요새도 안기부 시절부터 있던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한 나라의 정보를 총괄하는 기관이었던 만큼 이런 요새도 필요했을 터이다. 허나 과연 이곳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가. 알 길이 없다.
지하를 빠져나오니 광장 끄트머리다. 이곳에 출입구가 따로 있었던 것.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남산 타워가 보이고 그 아래 본관 건물 옥상에 세워진 첨탑이 날카롭다. 서울시는 이 본관 건물을 유스호스텔로 바꿀 계획이다. 물론 광장 지하의 요새에 설치된 종합상황실은 그대로 둔 채 말이다. 지금도 과거의 흔적은 하나도 볼 수 없는데, 이 건물이 유스호스텔로 바뀐다면 이제 말 그대로 옛 안기부 본관 건물은 기억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운명이다.

별관 뒷편에는 지하1층과 2층으로 들어가는 길이 따로 있다. 정문보다는 뒷문으로 드나드는 일이 더 많았던 것이 아닐까.

 

흔적조차 없는 고문의 현장들
발길을 돌려 옛 안기부 별관 건물로 향했다. 그곳은 지금 도시철도공사에서 연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악명 높은 별관 건물로 가는 길은 생각처럼 오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숲 속의 오솔길처럼 한적하고 포근한 맛이 있었다. 길 오른쪽에 자리 잡은 남산체육관을 지나치면 터널이 나온다. 산자락을 깎아내지 않고 터널을 뚫은 건데 다른 마감재 없이 온통 시멘트로 되어있어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비로소 남산의 악명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비록 100여 미터에 불과했지만, 이 터널을 통과해 가야했던 무수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귓전을 때리던 터널 안의 공명되는 음울한 소리가 영영 그치지 않을 것만 같았으리라.
터널을 지나면 사 층 건물이 보인다.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의 황인성(52) 사무총장 역시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다. 그는 세 번씩이나 남산에 끌려와 고문을 당했는데, 그곳이 바로 이 별관이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시위로 끌려왔을 때는 몽둥이로 발바닥을 때리거나 마구 차고 짓밟는 정도였다. 이듬해 민청학련 사건으로 끌려왔을 때는 차마 기억하기도 싫은 고문을 당했다. 발로 차고 몽둥이로 패는 건 약과였다. 잠을 안 재울 뿐만 아니라 흔히 통닭구이라 일컫는 고문도 당했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얼굴에 수건을 씌워 물을 뿌리는 물고문을 비롯해 담뱃불로 얼굴을 지져버리겠다는 협박 등등으로 정신적 공황을 유도했다. 황 총장의 표현을 빌면 한마디로 짐승이 되는 곳이었다.
“그곳을 나온 뒤에는 건장한 체격을 지닌 사람만 보아도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어요.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협소한 공간에 가면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습관이 생겼지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안기부로 바뀌어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지기까지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했으며 많은 사건이 조작되었다. 대표적으로 1973년 유럽거점간첩단 사건, 1974년 인민혁명당재건위 사건, 1985년 구미유학생 사건, 1993년 남매간첩 사건, 1994년 구국전위 사건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의 중심에는 ‘남산’이 있었다. 
별관 건물은 도시철도공사에서 연수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연수생이 없는 기간에는 한가하기 이를 데 없다. 연수원답게 대부분의 층이 강의실로 이용되고 있다. 복도에 서서 보면 좌우로 방문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그 모양으로 보아 과거에는 좁고 음침한 취조실이 있었던 것 같다. 그곳 직원에게 안내를 받아 지하로 향했다. 층계참으로 내려서는 순간 벌써 차갑고 눅눅한 공기가 얼굴로 달려들었다.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과거의 일일뿐이다, 이제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 라고 중얼거려도 소용이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집단무의식의 하나라고나 할까. 고문하는 수사관과 고문당하는 사람의 헐떡이는 숨소리, 고통을 참느라 잇새로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하지만 그건 사방이 막혀있는 지하 공간을 떠도는 필자의 발자국소리였다. 별관 건물은 모두 지하 2층으로 되어있는데 현재 지하 1층은 탁구장, 강의실, 실습실 등으로 이용하고 있다. 좌우 양쪽으로 높은 창문이 달렸는데, 아래에서 쳐다보는 바깥세상은 예전에 알고 있는 세상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나마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창문조차 없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도시철도공사 측에서는 특별히 지하 2층의 용도가 없어 리모델링을 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도시철도공사 입장에서야 어차피 2005년 6월 이전할 계획이므로 특별히 건물 관리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취조실이 남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벽을 모두 철거해 그곳은 그저 널따란 공간일 뿐이었다.

별관 지하1층은 현재 실습실로 사용되고 있다.

 
소설가 이호철(71) 씨도 남산에서 고초를 겪은 대표적인 문인이다. 그는 1980년 5월 17일 자정에 낯선 사람들에게 붙잡혀 이곳 안기부 별관 지하로 끌려왔다. 그때부터 7월 13일까지 꼬박 두 달 가량 햇빛 한 줌 보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그곳 직원들 옷차림을 보고 밖에 비가 오는구나 짐작할 뿐이었지요. 두 달을 갇혀 지내고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는데, 그때 정말 해방감을 느꼈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단지 안기부 별관을 벗어나는 것만으로 해방감을 느꼈을까.
하지만 이제 그곳 지하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단지 그 어느 때에도 존재했을 암울함이 곰팡이 냄새로 떠돌고 있을 뿐이다. 지하를 빠져나오니 바깥 햇살에 절로 눈이 찌푸려진다. 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아보니 건물 뒤편에 지하로 통하는 외부 계단이 따로 있다. 지하 1층과 지하 2층으로 곧장 통하는 계단이 구분되어 있다. 아마 지하로 끌려간 사람들은 이 계단을 통해 갔으리라. 그 계단을 내려서니 철창은 녹슬어 있고 먼지가 더께더께 앉아 있다. 벽의 모서리에는 생기 없는 거미줄이 상흔처럼 널브러져 있고, 굳게 닫힌 철문은 손으로 툭 치기만 해도 쇳가루가 풀풀 날린다. 

훗날을 위해 고통을 감내할 줄 아는 용기
옛 안기부 별관 왼쪽으로는 남산터널로 통하는 도로가 있다. 그곳은 통행이 금지되어 있어 내려갈 수는 없다. 오른쪽은 남산 산책로로 오르는 길이 나있다. 오래된 나무 의자에 앉아 산책을 나온 시민들이 쉬고 있다. 그들은 안기부 별관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렇게 나무 의자에 편히 앉아 과거의 악명 높은 건물을 지그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떠올릴까?
황인성 사무총장을 비롯해 소설가 이호철 씨, 그리고 한번쯤 남산에 다녀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남산 쪽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남산은 치욕의 현장이자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기피의 대상이다. 서울시에서 옛 안기부 건물을 유스호스텔로 바꾸려 한다는 얘기를 전하자 그들은 또한 한결같이 그건 안 된다, 고 말했다.
왜 그들은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남산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걸 거부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남산은 국가폭력의 증거물입니다. 또한 그곳은 양심과 진실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고통과 투지가 묻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뼈아픈 과거라 할지라도 남기고 보존해서 다시는 그런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수많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한 양심과 진실을 돌이켜보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황인성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남산 쪽은 쳐다보기도 싫다는 이들, 하지만 반드시 남겨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이 후손에게 교훈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말하는 이들. 
그들의 목소리는 안기부 별관을 빠져나오는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안기부 건물을 유스호스텔로 바꾸려는 서울시의 계획에 반발하는 건 대부분 시민단체들이다. 수십 년 동안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상징적 공간을 복원시켜 역사교육 현장으로 삼고자 하는 게 이들의 바람이다. 하지만 이건 무언가 잘 못 되었다. 정작 안기부 건물의 복원에 앞장서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국가정보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조금 길지만 뜻밖의 글이라 모두 인용해 본다.

안기부가 있던 시대의 '남산'을 기억하는 이들의 대다수에게 그곳은 치욕의 현장일 것이다. 이제는 그 치욕의 현장이 역사의 현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별관 옥상에서 바라 본 서울 시내)


국가정보원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애국지사들의 투철한 애국심을 계승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한다는 투철한 목적의식과 사명의식을 갖고 국민 앞에 다시 태어났다. 이에 국가정보원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주도한 의열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 한국광복군 등 오늘날의 정보기관과 같은 역할을 했던 독립운동 결사체로부터 그 역사적 뿌리를 찾아 오늘날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다.

국정원이 일본고관 암살과 관공서 테러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건 정말 뜻밖이었다. 하지만 돌려 생각해보면, 사상적 차이를 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정신을 잇겠다는 의도라고 이해해 줄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비록 중앙정보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로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꿨으나 여전히 그 기관들이 국민에게는 은어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국정원이 자신들의 연원을 독립정신에서 찾고 있다면 그에 걸맞게 자신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저지른 과오를 덮어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누구보다 앞장서서 고문과 인권유린의 현장을 복원함으로 깨끗이 과거를 청산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정보기관과 국민이 맞대고 있던 등을 떼고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그때, 은어는 사라진다.


글 손홍규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최명희 청년 문학상 소설 당선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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