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민주주의
아물지 않는 100년의 상처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서대문형무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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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바스티유 | ||||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이젠 안으로만 간직한 채, 서대문 시대 그 칠십구 년의 역사를 마감한 서대문형무소. ‘한국의 바스티유’로 불리기도 하다가 이제는 퇴역한 서울구치소, 아니 서대문형무소는 그러나 오늘, 아직은 철문에 빗장을 지르고 텅 빈 채로 침묵에 싸여 얼룩진 벽돌담과 감시탑만으로 말없이 오가는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 ||||
― 나명순, 『서대문형무소 소사』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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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식 감옥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94년 갑오경장 때이다. 당시 한양의 구치소격인 전옥서(典獄暑)를 감옥서(監獄暑)로 바꾸면서 출발했지만 근대적 의미의 감옥형태로 만들어지고 운영된 것은 경성감옥이 최초나 다름없다. 따라서 1908년 일제가 만든 서대문형무소를 우리나라 역사에서 근대식 감옥의 시작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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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감옥은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되었다가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경성이란 당시 서울의 이름을 떼고 서대문이란 작은 지명을 붙인 것은 치열한 항일독립운동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체포가 늘어 수용할 공간이 부족해지자 인근 마포구 공덕동에 다른 감옥을 지었기 때문이다. 서대문형무소는 해방 후에도 서울형무소에서 서울교도소, 다시 서울구치소로 계속 이름을 바꿨다. 벽돌 한 장, 흙먼지 하나에까지 일제강점기화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아픔이 스며있던 서대문형무소는 6월항쟁으로 한국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이 열린 1987년 11월 경기도 의왕으로 옮겨가면서 형무소로서의 역할을 끝냈다, 옮길 당시는 옥사가 모두 15개 동이었지만, 현재는 옥사 7개동과 사형장, 보안과 청사만이 보존되고 있다. 그 가운데 옥사 3개동(제10,11,12옥사)과 사형장은 1988년 2월 20일에 사적 제 324호로 지정된 바 있다. 1992년 정부는 형무소 일대를 독립공원으로 조성했으며, 1995년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공사를 시작해 1998년 11월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로이 태어나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 ||||
독립 민주 정신의 단련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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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한 강제점령이라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우리에겐 역사적 현실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민족독립을 향한 투쟁의 역사가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 계승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되었습니다.(역사관 소개 자료 중에서) | ||||
그러나 현재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 운동가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지만 해방 이후 1987년까지 교도소로 쓰였던 사실, 특히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저항의 역사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무 것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0년 전 만들어진 뒤 감옥으로 80년, 역사관으로 10년을 보낸 2008년, 서대문형무소는 여전히 지난 세기 갈등을 풀어내지 못한 채 절반의 역사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권위주의와 독재가 횡행하던 시절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받은 수많은 민주인사가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 ||||
통합의 역사를 담은 역사관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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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지어질 당시부터 이곳 수감자들, 특히 지배자에 맞서다가 잡혀 들어온 애국지사들은 형언키 어려운 고초를 겪어야 했다. 고문이나 폭력 같은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라 해도, 난방 같은 기본적인 시설도 없어 최소한의 생존만이 가능한 열악한 조건인데다, 무엇보다 수감자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 자체가 갇혀있는 이들에게는 한 순간의 짬도 없는 무언의 폭력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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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오는 밤(雪夜) | ||||
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어두운 공간에 갇혀 무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재와 같은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절망의 한 가운데서도 미래를 향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역사의 저편이 아닌, 살아있음으로 내쉬는 이들의 가쁜 숨소리를 들어 내 숨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런 곳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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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종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장 사진 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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