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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3년 <희망세상 11월호> 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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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레닌이 예견했듯이 전쟁과 혁명의 폭력의 세기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세계는 냉정하게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져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식민지 쟁탈전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사이의 체제전쟁, 제국주의에 대한 식민지의 민족해방전쟁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미국과 소비에트연방으로 대표되는 두 진영은 막대한 힘으로 이 세기를 지배했다. 그들은 부지런히 세계를 이념에 따라 찢어 가졌고, 진영의 유지를 위해 반목과 충돌을 원격 조정하기도 하고 손수 전쟁을 이끌었다. 대한민국은 그러한 힘들이 각축한 몇 안 되는 시범 국가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20세기는 일본제국의 침탈로부터 시작되어 겨레의 분단으로 이어지는 특이한 구도로 이어져 왔다. 20세기적 대결이 다른 곳에서는 국가단위로 이루어졌지만 한국은 하나의 영토에서 벌어졌다. 그건 오늘까지도 이어져 남북 어느 쪽도 미완의 국가에 불과하다. 문익환은 이 불행한 세기의 원년에 태어났다.
고독한 항해자
문익환은 1918년,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목사이며 민족의식이 강한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재린과 김신묵은 1899년 부모 손에 이끌려 기울어가는 조선을 떠나 옛 고구려와 발해의 숨결이 살아 있는 북간도에 와서 성년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1세대 어른들과 함께 그 땅을 개척했다. ‘동쪽을 밝힌다’ 는 뜻의 ‘명동(明東)’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에서 알 수 있듯이 그곳은 나라를 위해 인재를 기르고 힘을 갖추고자 한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땅이었다.
그곳에서 문익환은 민족시인 윤동주와 중 3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송몽규 등과 초·중·고 과정을 마치고 일본신학교에 유학한다. 도쿄 시절 만난 박용길과 결혼하고, 만주 신경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46년 월남하여 이듬해 30세의 나이로 한신대를 졸업하면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1949년에 다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했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33세의 나이로 유엔군에 지원, 통역자로서 정전회담에 참여한다.
문익환의 신분적 정체성이 최종 확정되는 것은 1955년, 미국에서 돌아와 한신대와 연세대에서 구약학을 강의하면서 그리고 한빛교회 목사가 되면서였다. 그 후 1968년부터 신·구교 공동 성서번역의 책임위원으로 매진하다가 비로소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에 연루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진다. 그때가 59세. 원로의 나이였지만, 재야운동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어 77세에 별세하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는 수난의 삶을 산다.
여기까지의 약력을 보면 사람들은 문익환의 삶을 상당한 범위에서 오해할 수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한 엘리트 교육을 받은 복 많은 젊은이이거나, 교수 재직에서 3·1민주구국선언까지의 20년에 이르는 안락한 중년 그리고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전무후무한 전적을 빛내는 불멸의 투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문익환의 삶에 새겨진 20세기의 발자국은 오히려 마찰과 불협화음에 있다. 만주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결코 다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혼돈의 해방기와 폭력의 한국전쟁을 지나며 겪은 고통과 이념의 편력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보고 견뎌야 했던 남이 들여다보기 어려운 생애의 편린들에 있다.
해방을 앞둔 어느 날, 문익환은 항일학생운동과 독립운동을 한 윤동주와 송몽규의 죽음을 접한다. 청소년기를 함께 보낸 그들의 죽음은 문익환의 많은 날들을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그리고 뒷날, 절친하게 지내던 장준하의 의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드디어 그는 탄압 받는 민중의 곁, 고난 받는 백성의 곁으로 떨치고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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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월, 3·1민주구국선언
1976년은 박정희 독재의 서슬 퍼런 철권통치 아래, 특히 긴급조치 9호 발령으로 온 땅이 얼어붙어 무거운 침묵이 강요되던 때였다.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 하나로 헌정(憲政)을 중단하고 변칙적인 방법으로 시작된 유신통치는 그 유신헌법마저도 제쳐둔 초 헌법적인 긴급조치로 일관되게 권력을 연장해가고 있었다. 누구도 나서서 정권을 비판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문익환은 민족의 얼이 서린 3·1절을 앞두고 비장한 결단을 한다. 장준하가 못 다한 일, 이 땅의 민주회복과 통일을 위해 독재와 맞서 싸우겠다고 결심했다.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어떻게든 강요된 침묵을 깨고 바른 말을 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문익환은 ‘3·1민주구국선언서’ 초안을 작성하여 곧바로 서명인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만났다.
한편 그 무렵, 일본에서의 납치사건 후 연금 상태에 놓인 김대중도 3·1절에 선포할 선언문을 독자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익환의 선언문 초안을 접한 김대중은 기꺼이 그의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 문익환은 자신이 작성한 선언서를 들고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면서 사람들을 접촉하고 그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선언문 내용을 수정 보강했다. ‘3·1민주구국선언서’가 확정되었고, 최종적으로 함석헌·윤보선·김대중을 포함한 10명의 서명 동의를 받았다. 선언서를 타자한 사람은 문익환의 장남 호근이었고, 등사는 한빛교회에서 밤을 새워 이해동 목사가 맡았다. 그리고 아내 박용길은 낭독을 위해 큰 글씨로 한지에 정서를 했다.
이 선언서는 마침내 1976년 3월 1일 밤,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 미사장에서 발표되었다. 선언서를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미사를 주관한 신현봉·함세웅·김승훈 신부가 소속된 가톨릭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사전 양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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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3·1절 쉰일곱 돌을 맞으면서 우리는 1919년 3월 1일 전 세계에 울려 퍼지던 이 민족의 함성, 자주독립을 부르짖던 그 아우성이 쟁쟁히 울려와서 이대로 앉아 있는 것은 구국 선열들의 피를 땅에 묻어버리는 죄가 되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을 모아 민주구국선언을 국내외에 선포하고자 한다.
그날 3·1절 기념미사는 평온 속에 끝났다. 그런데 다음날 관련자들이 연이어 연행되기 시작했고 구속되었다. 조용한 가운데 거행된 평범한 3·1절 기념미사가 얼마 뒤에는 갑자기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사건’으로 침소봉대되어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큰 사건으로 부풀려진 까닭은 필경 선언서의 서명자 가운데 박정희가 두려워한 김대중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1민주구국선언 관련 피고인은 모두 18명이었다. 김대중·문익환·서남동·문동환·이해동·안병무·이문영·윤반웅·신현봉·문정현·함세웅 등 11명은 구속이었고, 함석헌·윤보선·정일형·이태영·이우정·김승훈·장덕필 등 7명은 불구속이었다.
3·1민주구국선언은 형식의 경건성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폭발력을 대동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철권통치가 시작된 후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었고,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으며, 유신통치에 막대한 타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안에는 윤동주와 송몽규 그리고 장준하를 통해 깨닫게 된 문익환의 역사 의식이 드러나 있었다. 선언문을 기초할 때 문익환은 분명히 태평양전쟁으로 식민지 청년을 징발하던 무렵의 윤동주와 장준하와 박정희 그리고 자신이 각기 다르게 선택한 길을 대비하고 있었다. 역사학자 강만길은 이렇게 평가했다.
“문익환에게는 구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에 의한 1970년대의 ‘유신’통치가 일본제국주의의 1910년대 무단통치에 비유되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문익환은 1919년 3·1운동이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려는 역사 의식을 가진 종교인을 중심으로 발단된 사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76년의 3·1절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장준하가 주장하던 대통령 자격론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그러니 그곳에서 비롯된 경멸감이 박정희의 눈에 밟히지 않을 턱이 없었다. 문제 삼을 대목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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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판은 독재정권이 조작한 대로 가지 않았다. 얼마 전 타계한 변호사 홍남순은 “이 자리가 바로 만해 한용운 스님이 삼일독립선언문사건으로 앉으셨던 자리입니다.”라고 말해 장내를 숙연하게 했고, 함석헌은 전통적인 상복을 입고 재판정에 나타나 누군가 누가 돌아가셨냐고 묻자, 태연하게 “민주주의가 죽었어.” 했다.
뿐만 아니라 재판장은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논리적으로 설파하는 피고인들의 해박함과 달변이 이어지는 민주교실이 되어 있었다. 장내 분위기는 경건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했고 방청객들은 내면 깊숙이 이 기상천외한 재판에 통쾌해 했다.
피고들이 분투하는 동안 가족들은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입정을 거부하며 입에 검은 테이프를 십자가 모양으로 붙이고 공개 재판을 요구하기도 하고,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한복과 여름 원피스를 만들어 입고, 때로는 양산과 부채에 ‘민주인사 석방·민주회복’ 구호를 적어 시위 현장을 누볐다. 문익환의 아내 박용길은 아예 통일의 집(자택) 대문을 보라색으로 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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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비는 마음
문익환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고난과 철거민들의 투쟁현장 그리고 농민들의 애환과 함께 했다. 문익환이 재야에 뛰어들면서 엄숙한 결단과 비장한 슬픔이 아니면 헤쳐갈 수 없던 모든 과정이 전혀 다른 것으로 뒤집혀 버리곤 했다. 경찰이 겹겹으로 에워싼 시위장소를 뚫고 들어가 지친 농민들에게 자신을 현대판 홍길동이라고 지칭해 집회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고(1978년 함평고구마사건), 늦게 도착한 강연장에서 “오늘 주제가 전태일인데, 여러분이야말로 전태일이오. 오늘 강연은 딱 이 한 마디야.” 하고는 밤새워 노동자들을 붙들고 파스치료를 했다.
재야의 선봉장이었던 박형규 목사는 문익환이 등장하자 민주화투쟁이 신나고 즐거우며 함께하지 못하면 혼자만 소외되는 느낌이 들만큼 웃음이 넘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문익환은 쉬지 않고 꿈을 잃지 않는 일, 꿈같은 일을 상상하며 믿고 사는 일을 강조했다. 폭력을 본질로 하는 20세기적 속성이 한반도에서 작동하는 동안 모든 삶은 이데올로기적 편협과 독선, 증오 등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익환은 그 야만적인 무대를 아름다운 사랑의 장소로 바꾸기 위해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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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인기
1960년 출생. 1999년 『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받음. 현재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 인천작가회의 회원
사진제공 박용길 장로, 박용수
늦봄 문익환 목사 연보
1918년 6월 1일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아버지 문재린, 어머니 김신묵의 맏아들로 태어남
1924년 명동소학교 입학. 5학년 때 윤동주·송몽규와 함께 어린이 잡지 『새명동』을 만듦
1932년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재학 중 신사참배 거부로 중퇴
1938년 동경에 있는 일본신학교 입학
1943년 만주 봉천신학교로 옮김(학병거부), 만보산 한인교회 전도사
1944년 박용길과 평생가약을 맺음
1947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 받음. 을지교회 전도사
1950~53년 6·25전쟁 중 판문점 및 동경 UN군사령부에 근무, 휴전회담 통역원으로 일함
1954년 프린스턴신학교 신학석사학위 받음
1955~70년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학 강의. 한빛교회 목사로 시무
1975년 장준하가 의문의 사고로 죽자, 민주화운동에 투신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첫 투옥
1978년 10월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
1980년 5월 17일 내란예비음모죄로 세 번째 투옥
1983년 고난 받는 사람을 위한 갈릴리교회 담임목사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5·3인천항쟁으로
네 번째 투옥
1989년 3월 25일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 72세의 나이로 방북.
귀국 후 국가보안법으로 다섯 번째 구속
1991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6월 6일 이른바 ‘분신정국’에서 강경대 등 많은 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을 맡는 등 활동하다가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여섯 번째 투옥)
1992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1993년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 운동 제창
1993년 제 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1994년 1월 18일 통일맞이 사무실을 개소하고 새로운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해 전력하던 중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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