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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인의 상흔마저 프린트 한다. 사진가 이재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3. 11:19

저는 어린 시절 서울의 변두리에서 자랐습니다. 변두리라고 해야 동대문에서 1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 곳에 미군부대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이 기지 앞에 있었는데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살았던 동네였죠. 당시는 미군이 주인이었고 주변에 사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손님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쉬쉬했지만 우리 동네에는 미군들을 상대하는 아가씨가 많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여성들과 미군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나는 함께 자랐죠. 남자 아이, 여자 아이, 피부가 하얀 아이, 검은 아이 등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그 미군부대는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무렵 사라졌습니다. 미군들도 본국으로 돌아가고, 운 좋은 여자들은 혼혈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도 아니면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떠났죠. 미군부대와 함께 그들의 삶도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혼혈인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사진가 이재갑 때문이었습니다. 추억 뿐 아니라 그들의 이후 삶까지 읽을 수 있는 사진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1992년 8월 서울의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개인적으로 심한 슬럼프에 빠져 방황하고 고민하고 힘들어했을 때, 모 TV의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가수 박일준의 인생역정을 들었다. 박일준은 어렸을 때 우유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했다. 그 이유는 “계속해서 마시면 피부가 하얗게 된다고 믿었던 어린 마음에…….”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방청객들은 “하하하” 하며 큰소리로 웃었다. 나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모습들이었다. (이재갑의 작업노트 ‘아직 끝나지 않은 그들만의 전쟁, 혼혈인’ 중에서)

 

그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작업 계기가 이재갑의 혼혈인 작업을 14년 동안 끌어 오고 있습니다. 사실 워낙 대작인 탓에 사진의 형식과 내용은 그 동안 수차례 변화를 겪기도 했고 작업적 슬럼프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그가 사진으로 이야기하려 했던 혼혈인의 입장을 철저하게 당파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사진을 보면 1992년부터 2006년까지 작가가 얼마나 정열적으로 이 작업에 매달려 왔는지 독자들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의 작업 중에 <93년 파주 법원리 다이애나(7)>란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 속의 백인 혼혈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허름한 가건물과 하늘을 육중하게 누르고 있는 어둠은 이 아이의 현재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삐딱하게 서있는 다이애나의 모습에서 소녀애적인 이미지를 발견하는 동시에 법원리라는 기지촌의 공간과 불안정하게 동거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부초 같이 떠돌 수밖에 없는 이들의 영혼이 찍힌 것입니다. 이 사진을 통해 잊어버렸던 제 어린 시절 함께 놀던 혼혈 아이들이 다시 생각납니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하자면, 유전학적으로 혼혈인은 우수합니다. 양친의 각각 우수한 형질을 쌍방으로부터 물려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바로 진화의 비밀입니다. 떠들썩했던 다니엘 헤니나 하인즈 워드의 사례에서 보듯 그들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이재갑 작업의 전반이 고통스러웠던 한국의 혼혈인에 대한 눈물어린 기록이었다면 후반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함께 이 사회에서 함께 살 당당한 이유를 찾았으면 합니다. 그의 사진이 또 한번 진화하기를 기다립니다.
쪹경기도 양평 <갤러리 와, http://gallerywa.co.kr>에서 이달 중순까지 이재갑 사진전이 열립니다.


이상엽 inpho@naver.com
다큐멘터리사진가로 웹진 이미지프레스 http://imagepress.net의 대표. 『실크로드 탐사』(생각의 나무), 『그 곳에 가면 우리가 잊어버린 표정이 있다』(동녘) 등을 썼고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청어람미디어) 등을 기획하고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