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신의 여진을 생각합니다! 요즘 수·목요일에는 저녁모임이나 술자리를 거의 갖지 않습니다. 혹 있더라도 좀 더 일찍 종례하고 집으로 돌아들 갑니다. 수·목요일 저녁 신지도에서 벌어지는 풍속도의 한 장면입니다. 애초에 그 요일을 피해 술자리를 만듭니다. 모 방송국의 드라마 <해신> 시청 때문입니다. 텔레비전 시청률 상승에 한사코 보탬을 주지 못 하는 저이지만, <해신>의 등장 인물들이 빚어내는 삶의 모습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곤 합니다.
장보고와 염문, 정화와 채령 아가씨의 임에게로 향한 저 애틋함의 향방이 어찌 전개될 것인지를 저 또한 속앓이 하듯 지켜보고 있습니다. 물론 1,200여 년 전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일이란 죄다 경제의 노역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못함을 새삼 느껍게 감지하며, 21세기 들어 강대국의 지배욕에 더욱 휘둘리고 있는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장보고’가 작금의 우리에게 어떤 역을 담당하라 이르는지 그 훈육성 메시지를 한편으로는 버거워하면서 말입니다.
<해신>으로 생긴 완도의 신풍속 제가 첫 회부터 이 드라마를 본 건 아니었습니다. 시청하게 된 동기 또한 자발적이었다기 보다는 지역의 분위기가 한 몫을 담당했지요. ‘장보고의 고장’ 청해진이 바로 완도인 연유로 어느 자리에서건 드라마 <해신>이 중심 화제였습니다. 그래, 시쳇말로 <해신>에 ‘한번 빠져 봅시다’하는 누군가의 제의를 받아들여 저도 시청하게 된 것이지요.
어쨌거나 수·목요일이면 <해신>의 전편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고 어떻게 전개가 될지 자못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해신>에 심취해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게 되는 수·목요일 저녁 시간이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사실 드라마 시청이라는 게 일정 정도는 향정신성 의약품의 투약 효과가 있는 까닭에 방영 시간대가 다가오면 때때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잖습니까? 저는 그렇거든요. 광고가 지루해서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아마 제 이웃 또한 그런 풍경을 연출하고 있겠지 하는 상상이 떠오르면 푸훗, 실소를 머금게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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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도 폐인들끼리의 언중유골이 난무한다고 하더군요. 주인공이 조연에 밀리고 있는 극의 흐름에 문제가 있다는 최수종 팬들의 항의성 지적에 대해 송종국의 애련한 사랑이 보는 이들의 폐부에 닿음은 누구나 똑같게 느끼는 인식일 거라는 등의 대응을 통해 극의 내용으로만 본다면 송종국이 주연급 맞지 않느냐며 장외에서의 활전 또한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일전에 신지면의 어느 모임에 나갔었습니다. 각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여러 드라마의 시청률 통계를 적시한 자료를 보여주더군요. <해신> 몇 회 분의 시청률인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참석한 분들 모두 흐뭇한 어깨춤을 추더군요. 이렇듯 요즈음 완도 사람들은 드라마 <해신>을 즐겨 시청함과 동시에 시청률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습니다. 일종의 연대감을 촉발하는 매개역입니다.
완도군(청) 또한 완도를 알리고 쑤욱 쑥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최적의 기회로 삼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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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새로 짓고 무엇이 들어설 예정이라며 연일 뻑적지근하게 청사진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신지도 역시 개발의 희망에 부풀어 있긴 마찬가지입니다.
개발에 거는 희망사항? 겨울철 따뜻한 기후와 적당한 해풍 등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진 건강의 섬 완도에 권역별로 특화된 산업을 상호 융합, 최상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한방·스포츠밸리’가 조성될 전망(무등일보, 2005년 2월 7일자 17면)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계획에 의하면 신지면은 지난 2003년 풍부한 수산자원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미래의 고부가가치산업인 ‘해양생물산업단지’를 명사십리 주변의 울몰에 유치하였으며 약산면의 삼지구엽초 특화산업과 연계한 한방타운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덧붙여 명사십리 해수욕장 인근에는 체육공원과 해변 전지훈련이 가능한 스포츠 테마 파크를 건립할 예정이랍니다. 장밋빛, 장밋빛 꿈입니다. 그런데 장밋빛의 부푼 바람을 맞으면서도 이 바람이 삭풍이 되지 않길 비는 마음 또한 당돌하게 솟구쳐 일어납니다. 그동안 전국의 지자체에 의해 개발된 각종 사업이 친환경적이지 못하고 난개발의 폐해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2월 말 경 다녀온 부산의 자갈치 시장과 해운대 백사장을 떠올리니 더욱 그렇습니다. 어쭙잖은 제 소설 『오래된 잉태』에 수록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의 배경이 된 부산 국제여객선터미널 부근과 50년대 촬영 세트장 같았던 자갈치 시장의 건어물전 골목에 다시 한번 어슬렁거리며 소주 한잔 들이키고 싶어, 10여 년 만에 찾았던 것이지요. 부산에 일찍 도착하여 서둘러 자갈치 시장엘 갔습니다. 건어물전 골목을 먼저 들렀습니다.
1980년대와 2000년대가 동시에 공존하는 얄궂은 모양새로 바뀌었더군요. 1950년대의 정경은 쉽사리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변해야지요. 변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면 그래야지요. 하지만 변하지 않아 낡고 오래 되었다 하여 여길 다시 찾기는 난망하다고 하는 작자 있다면 그 또한 삶의 진정성을 갖지 못한 멋없는 사람일지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 건어물전 골목을 빠져 나왔습니다.
자갈치 시장의 여기저기 또한 파헤쳐져 도무지 10여 년 전에 느낄 수 있었던 흥겨운 정취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꼼장어 구이에 소주 한잔 걸치지 않고 쫓기듯 자갈치 시장을 빠져 나왔습니다. 국제여객선터미널 부근은 차 안에서 보는 걸로 대신했습니다.
다음날 해운대 모래밭에 갔습니다. 막 들어서자마자 저는 뭐 하러 부산에 왔을꼬 하며 새삼스러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헐헐헐, 헐헐헐 헛웃음을 허공에 날렸습니다. 어디 이게 모래밭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관부연락선」을 쓰기 위해 취재 차 갔던 그때만 해도 해운대 주위가 이처럼 삭막하게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모래밭과 주위에 온통 자그만 틈새 하나가 없어, 뻥 뚫린 바다를 보면서도 숨이 터억터억 막히더군요. 턱이 앙팡지게 진 모래밭도 모래밭이지만 위와 아래의 모래가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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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개발과 너무 많은 인파의 수용에 의해서 모래가 씻긴 탓이라는 기사를 언젠가 봤던 기억이 났습니다. 이 나라의 둘째가는 광역시이고 해변을 낀 도시라고는 하나 건드리고 다스릴 데가 따로 있지, 이게 무슨 막가파식 들어섬인가 하는 생각이 옆구리를 터억터억 내지르며 엄습하더군요. 밤바다를 보았더라면 더욱 질렸을 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을 하며 해운대를 빠져 나왔습니다.
해운대를 거울 삼아 그곳에서 완도의 명사십리를 떠올렸습니다. 명사십리는 해운대와 결코 비견할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명사십리 모래밭만큼이라도 후손에게 훼손하지 않고 물려주어야 할 너무도 소중한 자연 자산이라는 믿음을 해운대를 보면서 다시금 옹골차게 각인하였습니다.
<해신>의 여진으로 몰고 올 개발 움직임과 부산 해운대의 난개발이 겹쳐지는 걸 고개 저어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명사십리 모래밭만큼은 손끝 하나 건들리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어쩔 도리 없이 개발해야만 한다면 명사십리 모래밭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낼 수 있는 방향으로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는 각별한 믿음을 가져주길 간곡히 앙망해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연계성에 있어 조금의 무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두 분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임옥상 화백과 박두규 선생입니다. 임옥상은 지난 2003년 11월 28~29일 지리산에서 열린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주최의 <지리산 역사박물관 건립>과 관련한 세미나에 참석하여 ‘평화 콘텐츠의 보고, 지리산’이란 제목의 발제를 하였습니다. 그가 던진 포효같은 화두는 지금도 너무 감동적으로 떠오릅니다.
발제를 대강 기억해 내자면 ‘지리산, 이 크나 큰 산에다 박물관 하나 지었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라리 박물관이고 뭐고 간에 그냥 내버려두는 게 훨씬 역사적이며 역사성에 부응하는 인식이지 않겠는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대로 놔둔 현장이 바로 ‘역사’를 표증하는 ‘박물관’이라는 인식은 참 충격적으로 닿았습니다.
또 박두규 선생님은 현재 전남 순천 YMCA에서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해직교사입니다. 젊은 시절, 이곳 광주·전남지역에서는 꽤 열심히 공부한 독학(獨學)의 진보적 역사학도였지요. 『창작과비평』1979년 여름호에 「청해진대사 궁복 논고(淸海鎭大使 弓福 論考)」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이곳 완도의 역사성을 새롭게 부각시킨 분입니다.
당시 박두규 선생은 완도 화흥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이듬해 교사로 발령받아 교사로서의 위의를 서로 각인하면서 교류하다 그해 5월 광주를 겪고 난 뒤 박 선생과 저는 머리를 박박 밀고 눈물을 흘리며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질 못했었지요. 그때 그 시절 머리 깎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회상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그는 위의 논문에서 민중사관적 관점에서 청해진 대사의 행적을 해석해 냄으로써 교과서에 기술된 그릇된 시각을 통렬히 지적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조정하고 확장해 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천박하지 않은 개발이 되기를 장보고의 진보적 정치관(사상)을 제대로 보고 더불어 천혜의 자연 조건 속에서 심신을 여유롭게 다질 수 있는 관광지로 거듭 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분의 견해는 매우 시사적입니다. 자본주의의 천박함과는 거리를 둔 개발이 이뤄지길 참으로 빕니다. <해신>의 드라마적 흥미와 알게 모르게 그러한 몰정신적 유형으로의 개발 촉진에 빠져들게 될 지도 모르는 안개 뿌연한 상황이 결코 도래되지 않길 희망해 봅니다. <해신>의 여진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사진 황석선
글 한상준 전북 고창 출생 1994년 「삶, 사회 그리고 문학」 지에 「해리댁의」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작품집으로 <오래된 잉태>가 있음. 현재 교육문예창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며 전남 완도 신지중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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