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격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표면적인 것이 아닌 내면적인 변화를 원합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안세홍(37)의 사진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중심에 있다. 청년기부터 꾸준히 작업해 온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작업은 어느새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할머니들을 처음 찍을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찍고 나면 도무지 동네 할머니들과 구별이 안 되는 거예요.”
그는 할머니들을 찍으면서 차츰 일본·성노예·사회적인 문제 등에서 할머니들의 개인적인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드러나지 않는 슬픔과 개인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할머니들을 텍스트 없이도 이해시킬 수 있는 이미지 작업이 필요했다. “나와 피사체 사이에 아무 것도 없이 바로 투사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분명 카메라라는 존재가 있죠. 하지만 그것을 통하지 않은 듯 무의식적으로 대상을 찍어내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안세홍이 부단히도 당집을 쫓아다니며 무당들을 찍을 때 사용했던 방법이다. 무당들만큼이나 위안부 할머니들도 겹겹이 한이 쌓여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그런 마음으로 할머니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나이 내 경험치에서 오는 것들이겠지요.” 그래서 중국으로 떠났다. 우리에게는 알려진 바도 없었던 중국에 남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서 말이다. 그리고 오랜 침묵 속에 살아오면서 그런 한들이 쌓여 어느덧 그를 표현할 언어마저 망각해 버린 할머니들을 만났다. 그리고 겹겹이 쌓인 망각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치유의 이미지를 기록해 나갔다. 그렇게 10여 차례 중국을 오가며 느리게 작업 해 나갔다.
“사진은 소통할 수 있다는 것, 내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 또한 알지만 꾸준히 갑니다. 언젠가는 나도 모르게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재빠르게 작업할 줄 모릅니다. 남들보다 뭔가 좀 느리죠. 하지만 앞으로도 그 ‘느린 걸음’으로 갈 생각입니다.”
안세홍은 어린 나이에 『전태일평전』을 읽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이,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사회사진연구소’를 찾았다. 속칭 ‘사사연’. 사진가 이기원과 지금은 영화감독인 여균동 등이 활동하던 당대 민주화운동과 노동문제에 대해 가장 많은 기록을 수행하던 집단이었다. 그에게는 사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던 1990년대 초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20대가 지나면서 고민이 생겼다. 사진가로 살면서 생기는 자연스런 질문. ‘나는 잘 찍고 있는 것인가? 나는 앞으로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하는가?’ 안세홍은 우리 것에 대해, 한국적인 그 어떤 것에 토대가 있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공부하러 돌아다녔다. 전국을 구도승처럼 떠돌았다. 그렇게 3년 동안 한국의 정신을 쫓아 절집으로 당집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었다. 새록새록 모여든 취재처와 사람들이 그의 몸과 마음에서 켜켜이 쌓였을 때 계간 『디새집』에 정성스레 내보였다.
이제야 밝히지만 안세홍은 다리가 불편하다. 남들보다 빨리 뛸 수도 남들보다 먼저 도착 할 수도 없다. 그는 느린 걸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느린 걸음으로 도착할 그 곳에 남들이 먼저 도착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 이상엽 inpho@naver.com 다큐멘터리사진가로 웹진 이미지프레스 http://imagepress.net의 대표. 『실크로드 탐사』(생각의 나무), 『그 곳에 가면 우리가 잊어버린 표정이 있다』(동녘) 등을 썼고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청어람미디어) 등을 기획하고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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